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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셋에 대학 도예과 입학, 모두가 미친 짓이라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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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인생환승샷(56) 대기업 간부에서 옹기장이로, 최광근

인생에서 누구나 한번은 환승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직장이나 일터에서 퇴직해야 하죠. 나이와 상관없이 젊어서도 새로운 일,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실패한 뒤 다시 환승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인생 환승을 통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생한 경험을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2003년 전화국장 시절. [사진 최광근]

2003년 전화국장 시절. [사진 최광근]

2003년 KT 중견간부로 근무하던 중 28년의 직장생활 최고의 절정에서 과감히 퇴직을 결정하고 쉰셋의 나이에 경기도 여주대학교 도예과에 입학했다.

100세 시대 후반기 인생설계를 위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직은 공부가 끝나지 않은 세 자녀와 병약한 아내, 그리고 주변에서 용기를 주는 이도 있었지만, ‘얼마나 가나 보자’ ‘그 나이에 무슨 도자기를 한다고?’ 비웃고 의심하는 따가운 시선들이 힘겹게 다가왔다.

도자기를 선택하기까지 다섯 가지 기준을 정했다. 첫째 내가 좋아하는 일, 두 번째 80세까지 할 수 있는 일, 세 번째 일정 수입이 있는 일, 네 번째 자식 또는 주변에 부끄럽지 않은 일, 다섯 번째 내가 죽어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일이었다. 20여 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놓고 다섯 가지 기준에 맞춰 지워 갔더니 마지막 남는 것이 도자기였다.

사는 집을 처분하고 퇴직금을 보태고 대출을 받아서 다가구 주택을 매입했다. 어렵지만 월세를 받아서 생활하도록 아내에게 맡기고, 배낭 하나 걸머메고 여주읍으로 떠났다. 여주대학교 앞 원룸 자취생활, 기업 간부로서 많은 부하직원 위에서 군림(?)하던 나에게 절대 만만치 않은 학교생활이었다.

상주 정학봉 선생에게 옹기 수업받는 모습. [사진 최광근]

상주 정학봉 선생에게 옹기 수업받는 모습. [사진 최광근]

옹기 만들기는 뼈 굳기 전 스무 살 이전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 옹기계의 정설인데, 나는 쉰다섯에 시작했으니 참으로 어리석고 무모했는지 모른다. 뛰어난 머리도 소질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시련이 있었지만 4년의 옹기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2006년 내가 떠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먼저 다가구 주택을 처분하고 시골집을 매입하였다. 앞마당에 황토 공방을 짓고 가스가마 전기가마를 설치했다.

그리고 모든 도공의 꿈인 장작가마까지 지어 명실공히 공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주택 안채를 리폼하고 아담한 옹기갤러리를 오픈하여 그동안 지혜와 인내로 내조한 아내는 어엿한 갤러리 사장님이 되었다, 지금까지 50여명의 수강생을 배출하였으며 청주시 체험농장으로 지정받아 수시로 민간 및 학생들에게 체험지도를 하고 있다.

2008년 청주 젓가락 페스티벌 시연. [사진 최광근]

2008년 청주 젓가락 페스티벌 시연. [사진 최광근]

무엇보다도 대박은 나의 모교인 여주대학에서 도예과가 폐과되기 전(2014년)까지 4년 동안 외래교수로 초빙되어 옹기를 가르친 것이다. 옹기 때문에 교수님 호칭까지 얻게 되었으니 옹기가 복덩이다. 경력 15년의 늦깎이 옹기장이가 설 자리는 녹록지 않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고귀한 전통문화를 지키는 자리에 한 귀퉁이 낄 수 있다면 나의 ‘인생 환승’은 후회가 없다. 많이 늦었고 많이 부족하고 많이 배워야 하지만 나는 오늘도 어디든지 불러주면 달려가 수백 년 내려온 전통기법으로 내 키보다 더 큰 옹기 만들기를 시연한다. 역사와 조상의 숨결이 담긴 우리의 그릇 옹기, 그 숭고한 얼을 고이 간직한 ‘옹기’와 함께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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