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재의 퍼스펙티브

재벌 갑질 키운 건 팔할이 독점과 유착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공공의 적’ 된 국적 항공사 

대한항공 둘째 딸이 던진 물컵 하나가 세상을 크게 뒤흔들던 4월 말, 전직 장관 A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너무 커졌다. 다른 수가 없다. 조양호 회장이 물러나야 한다. 대신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앉히는 게 좋을 것이다. 웬만한 내국인 CEO는 ‘조 회장 일가와 한통속’이라며 여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당장 처벌·단죄에 그치지 말고 # 칼피아 근절, 항공 산업 개편 # 큰 그림 갖고 접근해야 # 경쟁 확대해 기득권 몰아내면 # 하늘 길 열리고 세상도 바뀌어 # 진에어 사태, 정부도 책임 #“면허 취소는 과한 처벌 # 빵 훔쳐 감옥 간 장발장 꼴”

당시 대한항공은 막 미국의 델타항공과 조인트벤처 협약을 체결한 뒤였다. “델타항공 CEO가 대한항공을 맡으면 되지 않겠나”며 A는 내게 그런 취지의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나는 솔깃했지만, 칼럼은 쓸 수 없었다. 한국의 항공법은 외국인 CEO의 항공회사 경영을 금지했다. 좋은 대안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사태는 잘 알려진 바다. 점입가경. 다섯달 전 3월 12일 물컵을 던졌을 때 둘째 딸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오빠가 일제 조사를 받았으며 경찰·검찰·관세청·공정거래위원회·국토교통부·보건복지부까지 나서 15차례 압수 수색과 5차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대중의 분노를 업고 여론 재판도 이어졌다. 최근엔 기내식 문제로 아시아나항공마저 ‘공공의 적’ 대열에 합류했다. 박삼구 회장의 ‘황제 의전’까지 불거지면서 날개 잃은 국적기들은 급기야 바닥을 모르고 추락 중이다. 재벌 갑질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사태가 여론 재판, 과잉 공권력, 칼피아에 국민연금 동원 논란까지 대한민국의 민낯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항공 사태를 보며 진짜 고쳐야 할 것이 뭔지, 고칠 방법은 있는지, 찾고 싶었다. 큰 틀은 쉬웠지만 각론은 어려웠다. 해법도 사람마다 달랐다. 당장 지배구조 개편부터 길게는 항공 산업 재편까지 숙제가 밀려있었다. 조종사·승무원, 전직 고위 관료 등 14명의 이해 관계자와 전문가에게 묻고 들었다. 다음은 그 결과물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① 독점이 키운 갑질=대한항공 조종사 B 씨는 “조 회장 일가의 갑질을 키운 건 팔할이 독점과 유착”이라고 했다. “독점이 갑질을 불렀다. 과거엔 대한항공이 항공을 독점했다. 직원은 잘리면 갈 곳이 없었다. 그러니 죽으나 사나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비용 절감이 필요하면 조종사·승무원 밥부터 줄였다. 이게 말이 되나. 지속적인 갑질을 가능하게 한 게 정부와의 유착이다. 국토부가 씌워준 큰 우산은 내부 부패가 밖으로 드러나기 어렵게 했다. 조회장의 가족 경영이  처벌받지 않는 갑질 세력이 된 이유다.” B 씨는 “그럼에도 다섯 차례나 구속 영장이 기각된 게 현실”이라며 “법이 못하면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대한항공 출신인 윤덕영 숙명여대 문화 관광학부 교수도 비슷한 시각이다. 그는 “분명 인민재판 같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이 정도 ‘갑질’이 불거지면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이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그러나 “갑질범이라도 법과 원칙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며 “모든 사람이 처벌을 원하더라도 법 규정이 없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게 법치국가의 원칙”이라고 했다.

② 진에어 면허 취소, 득보다 실=당장 시험대는 대한항공 계열 저비용항공사(LCC) 진에어 처리다. 외국 국적인 둘째 딸 조현민이 진에어의 등기이사를 6년간 맡은 게 빌미가 됐다. 항공사업법은 외국인 임원 등록 금지 조항을 위반하면 사업 면허를 취소하도록 하고 있다. 국토부는 지난달 30일과 이달 6일 두 차례 청문회를 열었다. 진에어 관계자는 “국토부 담당자가 면허 취소가 기정사실인 것처럼 얘기했다”고 전했다. 1700여명의 직원은 “임원 등록을 허용해 준 정부도 책임이 있다. 면허 취소는 총수 일가와 정부의 잘못을 직원들에게 덮어씌우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김병종 한국항공대 교수는 “면허 취소는 죄에 비해 벌이 과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빵 하나 훔쳤다고 감옥 간 장발장꼴”이라며 “징계나 벌금으로 끝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전직 장관 K 씨는 “외국인 임원의 존재가 항공 안전에 위협이 되기는커녕 되레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장관 재임 시절 이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그는 “알았다면 법을 고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항공사에 외국인 임원 참여를 전면 금지하는 나라는 없다. 항공산업의 특성상 되레 외국 전문가를 영입하는 추세다. 미국이 1978년 항공 시장의 규제를 모두 철폐한 이후 항공 자유화는 세계 시장의 큰 흐름이 됐다. 허희영 항공대 교수는 “영국 항공은 스페인 CEO를 영입해 경영 회복에 성공했고 중동의 에티하드 항공은 호주 국적의 CEO에게 12년째 지휘봉을 맡긴 결과 세계 20위 권 항공사로 도약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기회에 외국인 임원을 금지한 법규부터 바꾸는 게 옳다”고 말했다. 의견을 구한 14명 중 13명이 진에어의 면허 취소에 반대했다. 1명은 입장을 유보했다.

③ 칼피아 근절, ‘어떻게’가 없다=대한항공 사태의 뿌리엔 칼피아(대한항공+국토부 마피아)가 있다. 칼피아는 탄생부터 숙명적이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생태계였다. 황용식 세종대 교수는 “대한항공의 독점이 공생의 시작이었다. 전문가가 대한항공 출신밖에 없으니 국토부의 항공과는 주로 대한항공 출신으로 채워졌다. 오죽하면 항공운항과가 ‘대한항공 파출소’란 얘기까지 나왔겠나.”고 말했다.

국토부 감독관이 4년 전 ‘땅콩 회항’의 첫째 딸에게 온갖 편의를 봐주고 수사 자료까지 유출한 것도 이런 관계의 산물이다. 그때 칼피아를 확실히 도려냈다면 대한항공 사태가 이렇게 커지는 것을 혹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따지고 보면 6년씩이나 진에어가 외국인 등기임원을 둘 수 있었던 것도 국토부와의 유착이 원인일 수 있다. 그러니 의혹이 남는다. 국토부가 정말 6년간 위법 사실을 몰랐을까, 알고도 묵인한 건 아닐까. 담당 과장·사무관·주무관 3명을 검찰 수사하는 것으로 끝내도 좋은가. 혹 ‘꼬리 자르기’는 아닌가. 일이 불거진 뒤 김현미 장관은 “칼피아를 근절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미덥지 않다. ‘어떻게’가 없다. “철저한 내부 감사”지시가 고작이다. 관과 재벌의 유착은 끈끈한 이해·공생 관계를 바탕으로 철저히 음성화한다. 잡초보다 질겨 단단한 각오와 구체적·지속적·체계적 수단이 있어야 뿌리 뽑을 수 있다.

④ 경쟁이 답이다=길게 보면 해법은 갑질을 가능하게 한 국내 항공 산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 경영을 잘 못 하는 CEO는 직원들이 나서기 전에 시장에서 쫓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국민 정서가 폭발하지 않는다. 황용식 교수는 “시장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지 않아 여론 재판이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경쟁이 필수다. 하지만 국내 항공 생태계는 콱 막혀 있다. 사실상 대한항공·아시아나의 쌍독점(duopoly) 체제다. 2005년 제주항공을 시작으로 6개의 저비용항공사(LCC)가 생기면서 경쟁이 시작됐지만 갈 길이 멀다. 여전히 두 항공사가 차지한 하늘길은 70%에 이른다. LCC는 무엇보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 제주항공과 진에어 직원 수는 2013년 각각 812명·525명에서 올 1분기 2449명·1712명으로 5년 새 3배 가까이로 늘었다. 항공업계는 “항공기 1대당 직접 고용은 100명, 간접 고용까지 치면 2500~3000명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추산한다. 일자리는 구인 경쟁을 부르고 구인 경쟁은 갑질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대한항공 조종사·승무원들은 “LCC가 생기면서 그나마 직원 대우와 회사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이강석 한서대 교수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소비자 선택권도 커진다”며 “구시대적 경영자가 발붙일 공간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 정부 들어 신규 LCC 진입은 꽉 막혔다. 플라이강원(옛 플라이양양), 에어로케이의 면허 신청은 세 차례 반려됐다. 국토부는 ‘어항론’을 들고 나왔다. “어항에 물고기가 이미 많다. 더 집어넣으면 다 죽는다.”는 게 어항론이다. 항공사가 몇 개가 적정한지는 정부가 판단할 사항이 아니다. 항공 산업은 성장 중이다. 2017년 세계 항공 여객 수는 40억명을 넘어섰다. 국내 항공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게다가 LCC는 진화하고 있다. 플라이강원 처럼 지역 관광과 연계한 관광연계항공사(TCC), 프리미어클라스(비즈니스와 이코노미의 중간)로 하이브리드 항공을 꿈꾸는 에어프레미어항공 같은 신개념 항공사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잘 다루면 관광 한국의 꿈을 이뤄줄 일등 공신이 될 수도 있다. 길이 열리면 사람이 온다. 사람이 오면 세상이 바뀐다. 산업이 바뀌고 일자리가 생긴다.

길게는 항공청 설립도 고민해 볼 과제다. 지금처럼 국토부 내부 조직으로는 급성장하는 항공 생태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전문성도, 창의력도 기대하기 어렵다. 항공분야를 떼네 관광과 합쳐 항공청을 만들면 단순 여객 수송에서 벗어나 관광·레저·음식을 묶는 새 성장 동력을 만들 수 있다. 칼피아 근절에도 효과적이다. 평생을 항공에 전념할 전문 인력 확보가 가능하다. 기술·안전 분야는 정부에 전문 인력이 없어 항공사 출신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는 국토부의 핑계도 통하지 않게 된다.

국토부의 주 업무는 주택이다. 한국에서 주택은 이념이 된 지 오래다. 장관도 정권의 주택 이념과 맞아야 할 수 있는 시대다. 관료들이라고 자유로울 리 없다. 한국의 주택 정책은 규제 일변도다. 장관이 ‘강남과의 전쟁’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나라다. 시장과 업자를 조이고 비틀고 싸우는 게 일이다. 그렇게 수십 년 이념화한 관료가 1~2년 항공산업 지휘를 맡는 게 국토부의 관행이다. 그러니 어디 항공시장, 산업을 자유롭게 할 창의적 생각이 나오겠나. 항공청 설립이 전부는 아니지만 국내 항공 산업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큰 틀에서, 원점에서 항공산업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됐다.

◆도움말 주신 분

강신철 전 아시아나 상무, 김병종 항공대 교수, 이강석 한서대 항공교통물류학부 교수, 김제철 한국교통연구원 명예 연구위원, 윤덕영 숙명여대 문화 관광학부 교수, 최용덕 에어로케이항공 상무,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 익명을 원한 대한항공 조종사 A 씨, 승무원 B 씨, 전 장관 K씨, 전 국토교통부 고위관료 등 6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