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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살랑이는 물결, 그 안에 우주가 있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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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섬진강 수면의 빛을 찍은 작품 ‘밝은 강 건너가세’(2016). [사진 학고재]

섬진강 수면의 빛을 찍은 작품 ‘밝은 강 건너가세’(2016). [사진 학고재]

“여기 화면을 채운 것들은 빛이 넘실대는 물결을 찍은 거예요. 물결의 세밀한 움직임, 빛의 흔적을 파고 들어가니 넓고 깊은 우주가 보이는 것 같더군요. 몇 년 전 히말라야 고봉에 올라 느낀 에너지, 그 감각을 여기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사진작가 이창수 개인전 ‘이 그 빛’ #강물도 사람도 사라진 빛의 자취 #번잡한 삶에서 엿본 영원한 찰나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 ‘이 그 빛’을 열고 있는 사진작가 이창수(58)씨가 전시장에서 기자들에게 들려준 얘기다. 지난 2014년 예술의전당에서 개인전 ‘영원한 찰나’에서 히말라야의 사람과 자연을 보여줬던 그가 전혀 달라 보이는 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엔 산자락도 보이지 않고, 그 안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오로지 빛만 넘실거린다. 그가 섬진강 수면에서 건져 올렸다는 빛, 그 흔적의 기록들이다.

히말라야 산맥을 멀리서 바라보던 시선과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강물 수면에 빠져든 시선은 언뜻 극과 극처럼 달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그 둘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우주만큼 큰 세계, 찰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한 자연이라는 점에서다.

‘물과 함께 일렁이니’(2017). [사진 학고재]

‘물과 함께 일렁이니’(2017). [사진 학고재]

8000m가 넘는 히말라야 14좌를 힘들게 걸으며 “지금 걷고 있는 한 걸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는 섬진강 물결을 바라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쉼 없는 시간’ ‘방금 있다가 지금은 없네’ ‘애써 건너가니’ 등 이번 전시작의 제목들은 그가 히말라야에서 얻은 깨달음, 즉 ‘영원한 찰나’라는 주제와 이어진다.

이번에 그가 선보인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흐르는’ 강물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어두운색 바탕의 캔버스에 회화적 표현이 극대화된 것이 특징이다. 물결의 흐름을 부드럽게 포착한 작품도 일부 눈에 띄지만, 물결은 온데간데없이 극도로 정제된 빛의 흔적이 선과 면으로 남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결과 그 빛을 더 가까이 파고드는 일은 생각의 틀을 풀어버리는 작업과 같아요. ‘더 들어가면 무엇이 있지?’라고 물으며 물의 내부로 깊이 들어가 틀을 지우고, 또 지웠습니다. 그렇게 프레임을 풀어버리고 빛에 빨려 들어가니 처음에 보았던 것과 다른, 드넓은 세계가 열렸죠.”

학고재갤러리에서 '이창수:이 그 빛'전을 열고 있는 사진작가 이창수. [ 사진 학고재]

학고재갤러리에서 '이창수:이 그 빛'전을 열고 있는 사진작가 이창수. [ 사진 학고재]

물에서 시작해 빛으로 채운 화면은 관람객에게 다채로운 세계를 열어놓았다. 어떤 작품은 광활한 우주의 무수한 별무리로 보이고, 또 다른 작품은 이름 모를 생명체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아 놓은 듯하다. 그런 화면을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은 각기 다른 선들과 블루·옐로·화이트 등 미묘하게 다르게 표현된 색상이다. “과도하게 후보정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작업한다”는 그는 “사진을 찍는 시간대, 물의 흐름과 빛의 각도 등에 색상이 달라진다. 이것은 인위적으로는 다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강조했다. 찰나의 우연이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이번 전시는 이 작가가 오래전 자신과 했던 약속을 마무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한 뒤 뿌리깊은 나무, 월간중앙 등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던 그는 2000년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기며 지리산과 섬진강을 주제로 세 번의 전시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이 바로 2008년 ‘움직이는 산, 지리’(학고재), 2009년 ‘숨을 듣다’(성곡미술관)에 이어 세 번째다.

신관 지하 2층에서 만나는 7분짜리 영상 작품 ‘이 그 빛, 2018’은 작가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주는 귀한 선물 같다. 인디밴드 데이모노마드가 그의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곡과 물빛 영상의 하모니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의 발아래 흘러가는 물살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일렁이는 깊은 빛을 바라보라고.

전시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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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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