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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북한에 어떤 국가로 인식되나··· '불신'과 '미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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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유상철 기자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 차이나랩 대표

[유상철의 차이나 인사이트] 겉과 속이 다른 북·중 관계

‘혈맹(血盟)’과 ‘순망치한(脣亡齒寒)’. 모두 북·중 관계의 끈끈함을 말해주는 말이다. 중국은 북한을 도와 6.25 전쟁에 참전한 걸 ‘집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保家衛國)’이라 한다. 중국 지도자의 방북도 ‘친척 집에 간다(走親戚)’고 포장한다. 그러나 북한의 눈에 중국은 결코 달갑지 않은 모양새다. 지난달 본지 중국연구회 주최로 이뤄진 ‘북·중 관계’ 강연에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는 중국의 모습을 ‘불신’과 ‘미개’의 두 단어로 요약했다.

북한 엘리트는 중국 믿지 못하고 #대중은 중국이 미개하다고 여겨 #반목과 불신의 북·중 관계는 #미국이란 공동적으로 인해 유지 #북한은 미국에 중국 카드 내밀고 #중국은 북한을 창과 방패로 활용

“중국에 대한 북한 사람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한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중국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의 대중들이 중국을 북한보다 문화가 뒤떨어진 나라로 여긴다는 점이다.” 태 전 공사의 발언은 지난달 초 평양 통일농구대회 취재 차 방북한 우리 취재진에게 북측 관계자들이 “애들 키우는 집은 중국산 식재료를 사용한 음식은 먹이지 않는다”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태 전 공사는 북한 내 중국에 대한 불신은 그 뿌리가 깊다고 말했다. 역사 교육부터 그렇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게 ‘김일성 혁명역사’ 교육인데 그 내용의 절반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김일성이 어떻게 중국과 싸웠는가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김일성은 백두산을 깔고 앉은 중국 인민해방군을 몰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에서 1인 체제 다지기에 나서고 있는 점에 착안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일성은 우선 “마오 주석이 중국 공산당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것을 북한은 대대적으로 지지한다”는 말로 마오의 환심을 산 뒤 “북한도 중심을 세우는 작업이 필요한데 내가 백두산 밑에서 항일 투쟁을 벌였으니 백두산에 대한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62년 체결된 ‘북·중 국경헙정’에서 북한은 천지 전체 면적의 54.5%를, 중국은 45.5%만을 차지하게 됐다.

북·중 역사는 혈맹 운운보다는 투쟁의 역사였다는 게 태 전 공사의 말이다. 우선 1950년대는 중국을 등에 업은 연안(延安)파가 김일성 비판에 나섰다가 오히려 대거 숙청되는 종파(宗派)사건이 있었다. 60년대는 문혁의 불똥이 북한에도 튀어 홍위병의 김일성 성토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국경선 부근에서 북한을 욕하는 스피커 소리 때문에 태 전 공사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멀어진 중국의 본심은 70년대 확인됐다.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김일성의 제2 남침 계획을 중국이 좌절시켰다. 베트남의 사이공 함락 직전인 75년 4월 방중한 김일성은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건 조국통일”이라며 마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자 마오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게 돼 중국이 이제야 한숨을 돌리게 됐다”며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며 김일성의 말문을 막았다.

다른 하나는 김일성의 핵 개발 야심 견제다. 김일성이 마오에게 “원자탄 개발에 비용이 얼마나 들었나”라고 묻자 마오는 “북한은 핵무기를 가질 꿈도 꾸지 말라”고 냉랭하게 말했다. 이에 김일성은 귀국 열차에서 회의를 열고 “앞으로 우리가 핵무기 만드는 데 가장 큰 적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선언했다.

80년대엔 중국의 개혁·개방과 북한의 세습 문제가 부딪쳤다. 김정일은 방중 이후 “중국이 사회주의를 버리고 수정주의를 한다”는 비난을 퍼부었고 덩샤오핑(鄧小平)은 “김정일이 북·중 관계를 말아먹을 것”이라며 분노했다. 북·중 관계는 90년대 곤두박질쳤다. 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며 중국이 북한을 버릴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고, 90년대 중·후반 북한이 수십만 아사자를 낸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중국은 등을 돌렸다.

2000년대 이후엔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황이다. 2006년 10월 1차 핵 실험 이후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과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 부상이 중국 선양(瀋陽)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둘은 베이징대 외국어학부 영어과 동창이다. 리자오싱이 강석주에게 “핵 개발을 중지하고 경제건설에 전념하라”고 훈시하자 강석주는 “내가 지금 중국 외교부장 리자오싱과 담화하는 것인지 청나라 사절 이홍장(李鴻章)과 회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맞받아쳤다.

자, 그렇다면 북·중 관계는 이렇게 불신과 반목이 깊은데도 왜 파탄이 나지 않나.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한 안보 우려가 북·중을 하나로 묶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모순(矛盾) 그 자체다. 즉 창(矛)이자 방패(盾)다.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을 뚫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창인 동시에 미국의 직접적 압박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완충지대로서의 방패다.

반면 북한으로선 미국을 상대하면서 중국만큼 좋은 지렛대가 없다. 먼저 한국을 이용해 북·미 회담 카드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중국과 나빠졌던 관계를 복원한 뒤엔, 다시 회복된 중국 카드로 미국을 상대하는 작전이다. 북한은 양자 외교를 할 때 제3국을 카드로 활용하는 데 아주 능하다고 태 전 공사는 말한다. 이는 오랜 기간 중·소 틈바구니에서 ‘중국 기울기’와 ‘소련 기울기’의 ‘진자운동 외교’를 펼치며 북한이 체득한 것이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일이 갑작스레 중국을 찾은 게 대표적 예다. 김정일 방중은 북·중 관계 복원을 과시해 김대중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이 북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북한 뒤엔 중국이 있다는 시위였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판문점 정상회담을 앞두고 베이징을 방문한 것도 같은 이치다. 마치 북·중 간에 대단한 결속을 다짐한 듯 보여줘 한국의 양보를 끌어내는 전술이란 이야기다.

6.12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은이 5월에 두 번째 중국을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중 관계를 “친근한 중국 동지들과 굳게 손잡고 갈 것”(김정은) “순치(脣齒)의 관계”(시진핑) 등으로 포장해 북한의 몸값을 올리는 전술이란 것이다. 문제는 한·미가 북한의 이런 잔꾀에 매번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북핵 해결은 요원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중 간 전략적 경쟁에서 북한 비핵화 문제를 떼어내야 한다. 미·중이 무역전쟁을 벌이고 동북아에서 패권 경쟁을 할 수는 있겠으나 이게 비핵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해야 한다. 미·중 모두 북핵에 관해선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라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중국 견인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한·미는 중국과 긴밀하게 협의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이 비핵화 압력을 피하기 위해 중국을 이용하는 꼼수를 막을 수 있다.

유상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