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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싫은 어른들···왕후의 냉동실에 걸인의 냉장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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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한세의 노인복지 이야기(19)  

 우리 부모가 홀로 지내고 있다면 집을 방문했을 때 냉장고부터 확인해 보자. ‘걸인(乞人)의 냉장고’라면 ‘왕후(王侯)의 냉장고’로 바꾸어 드리면 어떨까? [사진 freeimages.co.uk]

우리 부모가 홀로 지내고 있다면 집을 방문했을 때 냉장고부터 확인해 보자. ‘걸인(乞人)의 냉장고’라면 ‘왕후(王侯)의 냉장고’로 바꾸어 드리면 어떨까? [사진 freeimages.co.uk]

1978년에 발표된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란 수필집엔 한 신혼부부의 밥상 이야기가 나온다. 실직한 남편이 집 근처 회사에 다니는 아내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쌀이 떨어져 아내는 아침을 거르고 출근을 했고, 미안한 남편은 노심초사 쌀을 구하러 다녔다.

아내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밥상 위에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반찬까지는 준비할 수 없던 남편이 밥상에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재치있는 내용의 쪽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다.

살림이 그리 넉넉지 않았지만 서로 마주 앉아 식사하며 오순도순 부부의 정을 나누며 살았던 1970년대 어느 부부의 실화라고 한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부부는 70대 노인이 돼 있을 것이다. 장성한 자녀들이 있을 터지만 함께 밥상을 마주할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부인만 혼자 남아 있다면 식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어쩌면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이 ‘왕후의 냉동실, 걸인의 냉장고’로 바뀌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녹록지 않은 혼자 사는 노인의 삼시 세끼

한 대학 여자 후배는 홀로 계신 친정엄마를 위해 명절에 친정집을 찾을 때마다 여러 음식들을 챙겨가고 매월 적지 않은 용돈도 드렸지만, 어느날 친정엄마가 병원에서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앙포토]

한 대학 여자 후배는 홀로 계신 친정엄마를 위해 명절에 친정집을 찾을 때마다 여러 음식들을 챙겨가고 매월 적지 않은 용돈도 드렸지만, 어느날 친정엄마가 병원에서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앙포토]

대구에 친정이 있는 대학 여자 후배가 있다. 후배의 친정엄마는 70대 후반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지낸다. 명절 때 식구들이 모이면 며느리와 딸들이 전도 부치고 갈비찜도 하는 등 잔칫집 같았다.

그때마다 식사도 잘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후배는 친정엄마의 삼시 세끼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배는 혼자 사는 노인에게 삼시 세끼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서울에 사는 후배가 대구에 갈 일이 생겨 연락도 없이 불쑥 친정엄마 집에도 들렀는데 전혀 예기치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친정엄마는 최근에 어지럼증세가 있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영양실조 진단이 나왔다며 무안한지 계면쩍게 웃으며 근황을 알려 주었다.

명절에 친정집을 찾을 때마다 갈비, 굴비, 사골 등 나름대로 고가의 식품을 바리바리 챙겨간 후배였다. 준비해 간 식품을 엄마 드시라고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 넣으며 이 정도면 다음 명절까지 어느 정도 드실 수 있겠지 하고 흐뭇해하곤 했다. 외식도 하고 맛난 것 즐기라고 매월 적지 않은 용돈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영양실조라니,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냉장고를 열어본 후배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냉장고 안에는 신 김치와 식은 된장찌개, 그리고 말라 비틀어진 나물 무침과 보리차가 전부였다. 전기밥솥 안에도 오래된 밥이 누렇게 색이 변해 있었고, 밥솥 안에 마른 밥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지난 명절에 넣어 둔 값비싼 갈비, 굴비, 사골이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된 어르신이 당신 먹자고 냉동 갈비를 해동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사골국을 끓이기는 쉽지 않다. 너무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려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이다. 설혹 이렇게 식사 준비를 해도 누구와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남편과 자식 생각에 오히려 마음만 더 적적해질 수 있다. 자녀들이 외식하라고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여 주어도 쓰는 데 익숙지 않다.

어렵게 산 젊은 시절 ‘걸인(乞人)의 찬’이 생각나 우리의 부모는 자식이 돈 쓰는 것을 미안해한다. 설혹 당신이 모아둔 돈으로 혼자 식당에서 혼밥한다 한들 이보다 더 처량한 것은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자녀가 용돈을 많이 드리고, 명절 때 먹거리를 켜켜이 쌓아드려도 이것이 곧바로 부모의 삼시 세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홀로 되신 분은 음식 하기도 귀찮고 함께 먹을 사람도 없으니 대충 끼니를 때우게 된다. 자연스럽게 만성 영양부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엄마 집 냉장고에 먹을 것 잔뜩 채웠는데 영양실조라니

친정엄마의 영양실조 이야기를 들은 후배는 이날부터 조리하지 않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냉장고를 채웠다. [중앙포토]

친정엄마의 영양실조 이야기를 들은 후배는 이날부터 조리하지 않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냉장고를 채웠다. [중앙포토]

친정엄마의 영양실조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후배는 생각을 바꿨다. 냉동실보다 냉장고를 어떻게 채워드릴까에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요리해야 하는 식단에서 다양한 간편식으로 눈을 돌렸다. 같은 단백질이라 하더라도 해동이 필요하고 조리하기 어려운 갈비보다는 계란 장조림이나 명태조림, 딱딱하지 않은 콩자반 등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냉장고를 채웠다.

오래도록 끓여야 하는 사골보다는 이미 제품화돼 데우기만 하면 훌륭한 끼니가 되는 ‘설렁탕’, ‘삼계탕’, ‘북엇국’ 등 즉석식품을 구매해 드렸다. 냉동실 안의 만두와 떡도 1인분씩 소포장해 손쉽게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끼니마다 먹을 만큼 소포장 된 요거트와 소화가 잘되는 두유도 구매했다. 특히 각종 곡물이 혼합된 두유를 선택해 단백질과 영양소의 발란스에 중점을 두었다. 하루 필요한 양만큼 포장된 견과류 세트도 함께 준비했다. 여기에 더해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인터넷 주문으로 한식 도시락 배달을 하기도 하고, 사과와 같은 과일은 산지 배송으로 보내고 있다.

이렇게 식단을 준비하고 자주 전화를 걸어 두유는 마셨는지, 견과류는 잊지 않았는지 마치 어린아이 약 챙기듯이 신경을 썼다. 이를 통해 삼시 세끼 매번 두유 한 개와 저녁에 TV를 보면서 하루 한 봉지의 견과류 먹기를 습관화하기 위해서였다.

후배가 석 달 후 명절 때 가보니 100봉지의 견과류 세트는 거의 없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봉지씩 꼬박 비웠던 것이다. 친정엄마는 이전처럼 아침을 거르지 않고 간단히 떡을 데워 사과와 함께 들고 있었고 후식으로는 요거트도 챙겨 먹었다.

후배는 얼굴이 한결 더 환해지고 기력이 좋아진 친정엄마를 보며 마음이 가벼워졌다. 준비해 간 반찬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두유와 햅반을 선반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후배의 손놀림도 경쾌해졌다.

규칙적이고 영양 잡힌 식단이 부모 건강 지킴이

규칙적이고 영양 잡힌 식단이야말로 부모 건강의 지킴이다. 또한 자주 방문하거나 전화를 드리는게 중요하다. [중앙포토]

규칙적이고 영양 잡힌 식단이야말로 부모 건강의 지킴이다. 또한 자주 방문하거나 전화를 드리는게 중요하다. [중앙포토]

규칙적이고 영양 잡힌 식단이야말로 부모 건강의 지킴이다. 용돈을 넉넉히 드리거나 어쩌다 값비싼 식품을 많이 사준다고 부모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혼자 쉽게 먹을 수 있는 식단을 마련하고 자주 방문하거나 전화를 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부모가 홀로 지내고 있다면 집을 방문했을 때 냉장고부터 확인해 보자. ‘걸인(乞人)의 냉장고’라면 ‘왕후(王侯)의 냉장고’로 바꾸어 드리면 어떨까? 그것이 부모님에 대한 바람직한 지킴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한세 스파이어리서치&컨설팅 대표 justin.lee@spireresea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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