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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문명기행

패권 향배의 나침반에서 인간사 희로애락까지 … 북한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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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문명기행’의 출발지는 북한산이다.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고작 앞산 가냐”는 비아냥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첫걸음으로 그 이상 좋은 곳을 찾지 못했다. 우선 한반도의 지리적 중심인데다, 역사적으로 패권의 향배를 가르는 요충이자 도읍지였다. 오늘에 와서는 장삼이사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받는 안식처가 됐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최소 1박이던 옛 북한산행 #다산 “폭우 속 세검정 최고” #정상 정복보다는 관산·탁족 #정상의 대가는 즐풍과 거풍

코스는 진관사-향로봉 경로를 택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애용하던 산행길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창의문(彰義門)을 나와 홍제원(洪濟院)을 지난 뒤, 진관사에서 몸을 쉬었다. 오늘날이야 등산로도 많고 오전에 산에 올랐다 점심때 내려와 막걸리로 갈증을 달랠 수 있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최소 1박은 해야 하는 만만찮은 여정이었다. 첫날 중흥사까지 간 뒤 두루 유람을 하고, 마지막 밤을 승가사에서 묵은 뒤 구기 계곡을 내려와 한양으로 돌아가는 코스가 가장 무난한 길이었다.

당일치기로는 세검정 나들이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이 한여름 소나기 속 세검정의 운치를 기록한 글이 있다.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에 이렇게 썼다.

“여러 사람들과 명례방(명동 일대)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날씨가 뜨겁고 습해지더니 돌연 먹구름이 사방에 일고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말했다. ‘소나기 내릴 때 폭포를 봐야 세검정의 경치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폭우가 쏟아질 징조인데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나 제군들.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벌주 10병을 한 번에 마시게 하겠다.”

다산이 반강제적으로 사람들을 끌고 세검정으로 2차를 간 셈이다. 정자에서 요란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일행들 앞에서 의기양양해 하는 다산의 모습이 귀엽다. 다산은 말을 달렸다고 썼지만 조금 빨리 걸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이 시대 사대부들은 달리지 않았다. 말잡이 딸린 말 등에 앉아서 갔다. 말잡이가 있으니 달릴래야 달릴 수 없었다. 이런 풍습을 연암 박지원은 부끄러워했다. 『열하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을 탈 때 따로 사람을 시켜 끌게 하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크게 비웃는다. 노는 아이들이 사람에게 말을 끌게 하면서 권마성(勸馬聲)을 내는데 그게 (‘이랴 이랴’가 아닌) ‘고려 고려’다. 우리의 말타기 풍습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다.”

북한산 향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비봉.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말과 가마를 타고 산행을 했다. 당연히 정상 정복이 목표가 아니었다. [이훈범 기자]

북한산 향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비봉.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말과 가마를 타고 산행을 했다. 당연히 정상 정복이 목표가 아니었다. [이훈범 기자]

말이 이동 수단이라기보다 신분과시용이었던 거다. 큰 차 좋아하는 오늘날 우리의 자동차 문화가 빚지고 있는 풍습이다. 산에 갈 때도 그렇게 갔다. 나도 진관사 코앞까지 차를 달려갔으니 크게 할 말은 없다. 시작은 이미 상당히 지쳤을 조선 선비들보다 앞선 셈이다. 하지만 염천에 걷자니 초입부터 숨이 막히고 땀이 비 오듯 한다. 한국전쟁 때 불타 1960년대 새로 지은 단아한 진관사 절집들, 백악관 셰프가 “원더풀 콩국수!”를 외쳤다는 진관사의 유명한 사찰 음식도 생각나지 않는다.

선비들은 이 길도 말을 타고 갔다. 말이 오르지 못하는 길은 두 사람이 메는 가마인 견여를 탔다. 승려들이 가마를 멨다. 공짜는 아니었을 테니 절에서 숙박과 차량을 제공하는 부업을 한 셈이다. 산을 즐겨 타던 퇴계 이황도 소백산 산행 때 견여를 타보고 “참으로 좋다. 권할 만하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는 퇴계에게 주지가 “주세붕 선생도 탔는데 뭐가 문제냐”고 설득하는 장면이 퇴계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왁자지껄하다. 가뭄에 발목밖에 차지 않을 계곡물에서도 사람들은 물놀이를 즐긴다. 이 역시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DNA가 시킨 짓이다. 이른바 선비들의 피서법, 탁족(濯足)이다. 체통 있는 선비들이 웃통을 벗어젖힐 순 없고 발만 물에 담가 더위를 쫓았다. 그것은 정신수양법이기도 했다. 탁족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는 『맹자(孟子)』의 굴원(屈原)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옳지 못한 것에 물들지 않는다는 의지 표현이다. 오늘날 그 뜻은 사라지고 그저 더위 쫓기로만 전락한 탁족이 애석하다.

계곡 물놀이를 즐긴 데서 알 수 있듯, 옛사람들의 산행은 정상 정복이 목표가 아니었다. 정도껏 올라 능선에 기대 산봉우리를 감상하는 걸 외려 즐겼다. 그러다 땀이 흐르면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거기에 술과 음식이 빠지지 않았고, 악사와 기생들까지 동원된 야외 연회도 드물지 않았다. 청백리로 뽑힌 유학자 주세붕도 기생 연회를 마다치 않았으니 그 시대엔 허물이 아니었다.

드물었지만 정상에 오르면 대가도 있었다. ‘즐풍(櫛風)’과 ‘거풍(擧風)’이 그것이다. 즐풍은 상투를 풀어헤쳐 머리카락을 바람에 말리는 것이다. 『장자』 ‘천하(天下)’장에 나오는 말로, 우(禹)임금이 거센 바람에 빗질하고(櫛疾風) 퍼붓는 빗물로 목욕하며(沐甚雨) 홍수를 다스렸다는 고사다. 몸을 돌보지 않고 국사에 전념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즐풍목우(櫛風沐雨)’가 거기서 나왔다. 시원하게 머리도 빗으면서 즐풍목우 정신을 되새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바람도 가렸다. 북풍이나 서풍은 안되고 오로지 동남풍이어야 했다. 그래서 동남풍이 부는 날 즐풍을 위한 산행을 했다.

거풍이란 원래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외사고에 있는 ‘실록(實錄)’ 책을 주기적으로 꺼내 말리는 ‘포사(曝史)’ 행사를 말한다. 산 정상의 거풍은 바지를 내리고 하늘을 보고 누워 실록만큼이나 중요한 남근에 햇볕을 쬐는 행위다. 체면에 얽매였던 사대부들의 유쾌한 일탈이자, 정상을 정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보상이며, 보다 하늘 가까운 순정한 태양의 양기를 받는 의식이었다. 향로봉 정상에 선 나도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 없지 않았으나 꾹 참았다.

이훈범 논설위원

>> 8월 16일자에 ‘북한산 기행’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