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원샷 원킬’ 규제개혁 … 아기 걸음 시작한 혁신성장 지휘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규제개혁 전초기지’ 기획재정부 혁신성장본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 마련된 기획재정부 혁신성장본부 사무실. 회의실 반대편에 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테이블·소파와 함께 직원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다트가 눈길을 끌었다. [김경록 기자]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 마련된 기획재정부 혁신성장본부 사무실. 회의실 반대편에 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테이블·소파와 함께 직원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다트가 눈길을 끌었다. [김경록 기자]

“거기 가봤어요? 공무원 사무실 같지 않던데….” 최근에 만난 경제부처 공무원들이 한목소리로 화제로 올린 곳은 지난 6월 하순 서울에 차려진 기획재정부 혁신성장본부였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보고서, 지정 좌석, 세세한 상하 간 지시가 없는 ‘3무(無) 조직’으로 운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바로 그곳이다. 김 부총리는 공무원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 정부 혁신의 진앙이 됐으면 하는 기대감까지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신(神)이 사람을 단련시키고 키우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그 사람이 ‘있는 자리’를 흩트리는 것이다.” 김 부총리의 책 『있는 자리 흩트리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부총리는 공무원의 ‘있는 자리’를 흩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조직의 목표인 혁신성장을 위해 무슨 내용을 준비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현장을 찾아가 봤다.

보고서·지정석 등 없는 ‘3무 조직’ #‘갈라파고스 세종’ 탈출 민간 속으로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점검회의 #매달 ‘시리즈’로 규제 혁파 준비 중 #김동연 “혁신성장은 긴 호흡 필요” #규제개혁에 공론조사 도입도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8층. 한쪽에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 30여 명이 일하는 기획재정부 혁신성장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대형 회의실 3개가 있고 중앙엔 일반 사무실과 비슷한 업무공간이 이어져 있다. 회의실 반대편엔 카페 분위기 물씬 풍기는 테이블·소파와 함께 다트가 보였다. 잘나가는 정보기술(IT) 기업의 파격적이고 아기자기한 사무실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다른 정부청사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김정관 기재부 정책보좌관은 “과거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일하는 방식을 바꿔보라는 부총리 지시가 있어서 사무실 배치에도 신경을 좀 썼다”고 말했다. 방기선 정책조정국장은 “국장급이 혁신성장본부 4개의 태스크포스(TF)팀장을 맡고 있지만 국장도 별도의 방이 없다”고 말했다. 사무실 입구 쪽 벽에는 몽골 재무장관 자문관으로 1년간 일했던 고형권 기재부 1차관(혁신성장본부장)이 사온 말 달리는 칭기즈칸 그림이 붙어있었다. 고 차관은 “칭기즈칸의 진취성과 배려의 마음을 새기자는 뜻”이라고 말했다.

세종을 떠나니 장점이 많았다. 가장 큰 차이는 민간 전문가와 만나기 쉬워졌다는 점이다. 임기근 재정기획심의관은 “기업인, 외부 전문가와의 미팅이 수시로 열린다”고 말했다. ‘육지의 섬’ 세종시에서 ‘갈라파고스 공무원’처럼 세상 흐름에서 소외됐던 이들에게 새로운 접점이 생긴 것이다. 김형욱 사무관은 “중간 간부인 과장이 없어서 팀장(국장)과 직접 소통하고 보다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을 벗어나 생긴 고충도 있다. 서울에 집이나 신세 질 만한 곳이 없는 젊은 직원들은 주변 숙소를 전전하며 주중 장기 출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혁신성장은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와 함께 J노믹스의 한 축이지만 변죽만 올리고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혁신성장의 핵심은 규제 개혁이다. 관가에서는 매달 규제개혁 점검회의를 직접 주재하겠다는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처럼 회의 때마다 하나씩 규제를 해결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주 청와대 SNS 방송에 출연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규제혁신 정책을 ‘시리즈’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인 만큼 어떤 안건을 올리느냐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결론을 낼 수 있는 규제여야 하고 구체적인 실행방안까지 담아야 한다. 주로 혁신성장본부가 그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찬우 기재부 차관보는 “거대 규제보다는 뭔가 새로운 산업과 서비스가 나와 국민이 실생활에서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핵심규제를 선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은행의 은산분리, 개인정보 규제를 비롯해 수도권 규제, 원격의료, 복합리조트, 암호화폐 공모(ICO) 등이 후보군에 오른 것으로 예상된다. 이 사무실을 기지 삼아 혁신성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동연 부총리에게 직접 확인해봤다.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 점검회의를 김 부총리가 건의했다던데.
“(에둘러 말하면서) 꼭 그렇진 않다. 청와대 안에서도 공감대가 많았다. 특히 VIP(대통령) 의지가 강했다.”
혁신성장, 성과를 내야 할 텐데.
“혁신성장은 단기간에 되는 게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은 정부의 빠른 의사결정과 예산 투입으로 움직일 수 있지만 혁신성장은 법 개정을 포함한 제도와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 노동시장·교육 개혁 같은 구조개혁 없이 어떻게 혁신성장이 되겠나. 빨리 성과를 내라는 건 잘 모르는 사람들 얘기다. 학기 내내 준비해서 내는 학기말 보고서(term paper)를 강의 때마다 내라는 것과 같다. 긴 호흡이 필요하다. 물론 정책 방향과 정부의 의지를 예측 가능한 단일 메시지로 담아 시장과 민간이 붐업할 수 있도록 시그널을 줘야 한다. 빠른 시간 안에 정부의 정책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방안이 규제개혁이다.”
규제개혁과 혁신성장의 관계는.
“최저임금이 소득주도성장의 전부가 아니라 여러 정책 수단 중의 하나인 것처럼 규제개혁을 혁신성장의 전부로 인식하는 건 잘못이다.”

김 부총리의 혁신성장 개념은 선도사업 1, 2팀과 규제혁신·기업투자팀, 혁신창업팀으로 구성된 혁신성장본부 조직을 보면 알 수 있다. 규제를 풀어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고 벤처창업을 활성화하며 인공지능(AI)·빅데이터, 수소경제, 블록체인, 바이오 등 미래 성장동력과 먹거리에 정부가 조(兆) 단위로 투자하는 ‘메가투자 프로젝트’도 고민 중이다. 김 부총리는 “과거 산업화 시대처럼 정부가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게 아니라 인프라를 조성하고 핵심인력을 키우거나 취약계층을 지원해 생태계나 플랫폼 경제를 만드는 투자에 정부가 필요한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메가투자 프로젝트는 지지부진한 경기를 인위적으로 띄우기 위한 정책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정부가 기업보다 미래의 플랫폼 경제를 잘 알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김 부총리는 “산업이 아니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에, 민간이 할 수 없는 분야에, 국제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쪽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혁신성장본부가 메가투자 프로젝트를 정하면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 반영된다.

규제개혁에 공론조사를 활용하기로 한 건 새로운 시도다. 이수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규제개혁에 공론조사를 도입하면 일반 국민과 소비자의 참여를 통해 이해관계자의 반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 부총리는 “혁신성장은 정부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고 했다. 법률 제·개정은 국회와 정치권이, 미래 플랫폼 경제 구축은 결국 민간이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토로하는 이유다. 일하는 방식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업무계획, 국회 답변 등 의무적으로 작성하던 보고서가 없어져 핵심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배준형 서기관)는 호평이 있지만 그렇다고 보고서가 사라지진 않았다. 지정좌석은 없지만 국장이 주로 앉는 자리에 부하 직원은 앉지 않는다. 세종청사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일 많고 퇴근이 늦다. 혁신성장도, 일하는 방식 혁신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