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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7월 수상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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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원>

행복빌라 405호 -독거
-김성애

그 무얼 훔쳐봐서 가슴에 금이 갔나
남쪽에서 날아온 집요한 저 통증들
또다시 비탈진 그리움
밥 먹듯 읽고 있다

꽃이 되지 못한 꿈 숨어든 골방에서
뒷걸음친 세월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새들이 남긴 지문으로
검버섯 닦았지만

주춤주춤 일어나 탈색된 커튼 걷고
습해진 가구들을 하나씩 매만질 때
헐렁한 골목 사이로
장맛비가 내린다

◆김성애

2018년 7월 시조백일장 장원 김성애

2018년 7월 시조백일장 장원 김성애

1963년 경상북도 경산 출생. 시조집과 중앙일보시조백일장 작품 위주로 수년간 공부.

<차상>

원의 작도  
-이현정

찰나의 눈빛이 한 가운데 점을 찍자

일순간 동일주파수로 진동하는 공명

팽팽한 구심과 원심 좋이 붙잡힌 균형

지금은 비록 굽이굽이 돌아갈지라도

오래도록 깊숙이 중심 잃지 않은 끝에

둥글게 그리던 슬픔 같은 곳에 닿으리

<차하>

여름날의 좌판
-황남희

그늘진 인도 한쪽 좌판 벌인 할머니
챙 넓은 모자 쓰고
하나,
둘....
졸고 있다
젊은 날 추억을 좇다
셋, 순간 놀라 깬다

<이달의 심사평>

지나친 폭염에 지친 탓인지, 이 달은 의외로 풍성한 응모편수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아쉬운 작품이 많았다. 심사위원들은 시조미학의 근간인 기본운율에 충실하면서도 작품의 내면에 생명을 불어넣는 선명한 이미지 확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관점에서 독거노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고발영상물처럼 생생하게 조명해낸 김성애의 ‘행복빌라 405호’를 장원으로 올린다. ‘행복빌라’라는 표제와 전혀 상반되는 “그리움”과 “통증”의 불행한 이미저리로 각수를 채움으로써 아이러니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골방” “커튼”이라는 소외와 단절 속에서 “뒷걸음친 세월” “검버섯”의 노쇠한 삶은 “헐렁한 골목 사이”로 소통을 꿈꾸지만 결국 “장맛비가 내리”는 비정한 현실인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마치 카메라로 찍듯이 각 장면들이 줌업과 롱테이크로 처리되는 시점이동이 능숙하고 인상적이었다.

차상으로는 이현정의 ‘원의 작도’를 올린다. 컴퍼스로 원을 작도하는 행위를 통해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같은 곳에서 만나리”라는 공동체적인 삶의 결속과 인간애로 풀어낸 재미있는 발상이 호평을 받았다.

차하로는 황남희의 ‘여름날의 좌판’을 선한다. 여름날 좌판을 벌인 할머니들의 모습을 “하나, 둘.... 졸고 있다/셋, 순간 놀라 깬다”라는 재치와 익살 넘치는 생동적인 표현으로 단시조의 전형을 잘 살리고 있으나 너무 소품에 머문 것이 아쉬웠다. 이외에도 김애숙, 최인식의 작품이 논의대상이었으나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또한 당해 연도 내에 한 번 입선한 분이 같은 해에 반복 응모할 경우는 선외로 함을 밝힌다.

심사위원: 박권숙·최영효(대표집필 박권숙)

<초대시조>

목련 편지  
-박영식

새하얀 A4지를 장장이 꾸깁니다
예쁜 뺨 적셔가며 푸른 편지 쓰는 봄밤
몇 줄은 뒤채는 이웃의 뼈아픔도 눕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삶이 무척이나 짧습니다
빛처럼 왔다가 뚝 떨구는 꽃잎같이
누구나 그런 한 생이 찰나임을 모릅니다

백열등 필라멘트가 갑자기 퍽! 나갑니다
더는 쓸 수 없는 가슴앓이 사연 앞에
생멸(生滅)은 과연 무얼까 골몰하게 됩니다

◆박영식

박영식 시조시인

박영식 시조시인

경남 사천 와룡 출생.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집 『굽다리접시』 『자전거를 타고서』 『가난 속의 맑은 서정』 등. 성파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김상옥시조문학상 등 수상.

봄날의 교정(校庭)에서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도 목련꽃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로 시작되는 박목월 선생의 시에 곡을 붙인 ‘4월의 노래’는 청소년들의 풋풋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족하다.

아직 바람이 찬 봄날, 순백의 꽃봉오리는 물오른 생명을 예감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독한 상태이다. 미적 대상 앞에서 인간이 고독에 처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존재의 축소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봉사하거나 닿지도 못한 채 너를 향한 나의 부름만 메아리친다. ‘목련 편지’에서 “새하얀 A4지를 장장이 꾸깁니다”고 했을 때, 목련 꽃잎은 자아의 의지를 표상하는 상관물이다. 너를 향한 부름은 구겨진 “편지”처럼 쌓이고, 봄밤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만다. 이윽고, 무더기로 떨어져 누운 꽃잎들 속에는 “뒤채는 이웃의” 사연들도 섞여든다. 그만큼 한 아름다움, 혹은 인생이 왔다가 지나가는 일이 “찰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만남의 시간은 언제나 지연된 채 성사되지 않는다. “백열등 필라멘트가 갑자기 퍽! 나갑니다”고 했을 때의 단명(短命)한 꽃잎처럼, 대상 지향의 시간은 꺼져버리고 생의 시간들도 덧없이 흘러가고 만다.

꽃의 시간이나 인간 “생멸”의 시간이나, 그 길이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흰 꽃잎의 편지를 띄우고자 하는 것은, 그 찰나의 시간에도 “가슴앓이 사연”들이 개입되면서 생이 애환 속에 영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배면에 스며있는 아픔과 함께 인간은 한 생을 살다가는 것이리라.

염창권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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