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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사라지는 세상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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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새 영화 '인랑'(25일 개봉)으로 돌아온 김지운(54) 감독.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새 영화 '인랑'(25일 개봉)으로 돌아온 김지운(54) 감독.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 정도 규모 영화면 편집‧CG(컴퓨터그래픽) 작업이 길어야 하는데 ‘인랑’은 여름시장을 겨냥한 영화다보니, 올해 3월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3개월밖에 못했어요. 제가 영화를 충분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그게 제일 아쉽습니다.”

26일 서울 삼청동에서 신작 ‘인랑’으로 만난 김지운(54) 감독의 말이다. 전날 개봉한 영화가 혹독한 평가에 시달린 뒤였다. ‘달콤한 인생’(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등을 연출한 액션 비주얼 장인의 총제작비 230억원 SF 액션 대작. 애초 ‘인랑’이 올해 기대작으로 손꼽힌 이유다. 원작인 동명 일본 애니메이션의 음울한 세계관을 스크린에 어떻게 구현할지도 관심이 높았다.

SF액션 ‘인랑’의 김지운 감독 #보수·진보 집단 혐오 점점 심해져 #편집·CG 기간 부족 못내 아쉬워 #“액션 좋은데 이야기는 미흡” 비판 #분량 늘린 ‘새 편집본’ 나올 수도

그러나 불과 개봉 하루 만에 판도가 바뀌었다. “한국에서 보지 못한 액션” “신선한 소재”란 호평도 있지만,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더 컸다.

첫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인랑’은 같은 날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폴아웃’만 아니라 2주차에 접어든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2’에도 밀렸다. 손익분기점 600만 명엔 턱없이 못 미치리란 관측이 나온다.

-개봉 후 반응이 저조하다.
“시사회 때부터 맷집이 약간씩 생겼다. 수많은 관람평을 읽었는데, 무엇을 칭찬하고 꾸짖는지 잘 알겠다. SF인 줄 알았는데 멜로였다든가, 원작과 다른 엔딩 등 영화가 기대했던 바와 어긋났을 때의 실망감이 작품 전체의 완성도까지 무너졌단 느낌을 크게 준 것 같다.”

오시이 마모루가 1999년 각본을 쓴 원작은 60년대 일본이 배경.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이 독일 점령군에 통치됐다는 대체역사를 통해 일본 전공투 세대의 허무감을 드러냈다. 영화는 이를 남북한이 통일준비에 돌입한 2029년 한국을 무대로 옮겼다.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인간병기 임중경(강동원 분)이 자신이 속한 경찰조직 ‘특기대’와 정보기관 ‘공안부’, 반(反)통일 테러단 ‘섹트’의 암투에 휘말린다. 여기에 임중경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여성 이윤희(한효주 분)와의 로맨스가 가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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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시이 마모루가 연출한 또 다른 SF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를 실사화하려다 ‘인랑’을 선택했다고.  
“‘인랑’을 통해 강화복(특기대 전투복) 수트 액션을 한국에서 시도해보고 싶었다. 강화복을 입은 주인공은 처음엔 가공할 화력을 갖춘 로봇처럼 보이지만, 나중엔 혼자만의 벽에 고립된 고독하고 슬픈 존재로 느껴진다. 명분 없는 전투에 동요하는 인물의 처참한 싸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인랑' 한 장면. 강화복으로 중무장한 임중경과 특기대 대원들. '조직'이란 테두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임중경의 처지는 극중 여러 '벽'의 이미지로 강조된다. 강화복 자체도 그를 에워싼 단단한 '벽'이다. 강화복 수트는 '아이언맨' 수트를 만든 할리우드 제작진이 참여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인랑' 한 장면. 강화복으로 중무장한 임중경과 특기대 대원들. '조직'이란 테두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임중경의 처지는 극중 여러 '벽'의 이미지로 강조된다. 강화복 자체도 그를 에워싼 단단한 '벽'이다. 강화복 수트는 '아이언맨' 수트를 만든 할리우드 제작진이 참여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경을 10년 뒤 미래로 각색했는데.
“민족적‧국가적으로 트라우마로 작용할 만한 큰 사건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4·19나 5·18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도 생각했지만, 바뀐 과거로 돌아가는 건 너무 영화적인 선택 같았다. 통일 이슈를 가져오면 원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던 권력기관들의 암투를 더 명징하게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년실업, 출산율 저하 등 현재의 징후들을 극단적으로 과장한 미래상을 그려 현실감을 강하게 주고자 했다.”
-여러 조직을 묘사하면서, 선악구도는 일부러 모호하게 다뤘다는 인상을 준다.  
“개인을 억압하는 ‘시스템’ 자체를 거대 악으로 해석했다. 근현대사로 보면 5·18 때 양민을 학살한 공수부대,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했던 백골단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고 받은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하고 구원받을까. 설혹 명령이 옳은 것일지라도 대의명분을 위해 작은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시스템의 강요는 결국 개인을 황폐하게 하고 망가뜨리는 것 아닐까. 박근혜 정권 때 시나리오를 썼는데, 진영싸움이 거세던 당시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들여다보면 개개인의 자유주의적인 발언이 진보‧보수 관계없이 엄청난 탄압을 받더라. 집단화와 함께 혐오문화도 심화됐다. 어려서부터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삶의 모토처럼 살았는데 점점 개인이 사라지는 세상이 돼간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영화엔 원작에 충실한 거대 지하수로 액션, 서울타워를 관통하는 격투와 차량액션 등 굵직한 볼거리가 많다.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 ‘아이언맨’ 수트 제작진이 만들었다는 강화복 역시 한국영화에 없었던 독특한 액션 비주얼을 선사한다.

서울타워 주차장에서 펼쳐지는 긴박한 자동차 액션. 김지운 감독은 "원래 남산 산비탈을 누비는 카체이싱을 원했지만 한파 등으로 포기해야 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정두홍 무술감독이 이번 작품도 함께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서울타워 주차장에서 펼쳐지는 긴박한 자동차 액션. 김지운 감독은 "원래 남산 산비탈을 누비는 카체이싱을 원했지만 한파 등으로 포기해야 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정두홍 무술감독이 이번 작품도 함께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러나 액션에 너무 골몰한 탓일까. 초반부 중요한 모티브로 부각됐던 남북통일은, 굳이 통일 정국이 아니어도 상관없을 듯한 권력기관 간의 암투에 묻히고 만다. 서사의 기둥이 돼야 할 임중경의 고뇌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책장에 꽂힌 『죄와 벌』 『체 게바라 평전』같은 책이나, 이윤희의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빨간 망토 소녀 이야기’ 등 조직의 명분과 개인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들의 내면을 암시한 요소가 곳곳에 등장하지만, 전체 스토리의 맥락과 매끄럽게 연결될 만큼 감정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일부 관객에게 이들의 관계가 “뜬금없는 멜로”로 느껴진 이유다.

원작에서 인물들의 고뇌를 극대화했던 비극적 엔딩도 영화에서 정반대로 바뀌었다. 김지운 감독은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만큼 새드엔딩은 부담이 있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전작에서 너무 많은 인물에게 가혹한 시련을 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악마를 보았다’(2010)를 지금 만들면 수현(이병헌 분)이 맞을 결말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어요. 내 영화의 인물들, 어쩌면 저 스스로에게 휴식 같은 엔딩을 주고 싶었습니다.”

영화 '인랑'에 삽입된 단편 애니메이션 '빨간 망토'. '인랑'의 원작자 오시이 마모루가 김지운 감독과 논의해 직접 연출했다. 작화는 테라다 카츠야가 맡았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인랑'에 삽입된 단편 애니메이션 '빨간 망토'. '인랑'의 원작자 오시이 마모루가 김지운 감독과 논의해 직접 연출했다. 작화는 테라다 카츠야가 맡았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방대한 세계관을 상영시간 138분에 녹여냈다. 취사선택에 고심한 부분은.  
“임중경이 강화복을 입고 작살을 맞은 뒤 다리에 모르핀을 투여하는 장면이 있었다. 숨을 헉헉대며 피로에 찌든 인간병기의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낸 장면인데, 이어 나오는 클라이맥스 액션의 탄력을 떨어뜨리기에 편집에서 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정된 시간 안에 리듬과 템포를 잡기 위해 찍어놨던 것들을 걷어내다 보면 그 장면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심어놨던 아이디어나 무드, 결과적으론 내 색깔을 없애버리는 느낌도 든다”면서 “‘인랑’에서 하려던 얘길 온전히 다 하려면 지금보다 15~20분 정도는 길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차기작으론 유럽 방영을 목표로 한 4부작 프랑스 드라마를 논의 중이다. 연출 데뷔 이래 첫 드라마다. 프랑스 작가의 대본을 토대로, 현지 배우와 더불어 한국 여성 배우의 주연급 캐스팅도 염두에 두고 있다. 검토 중인 한국 작품도 있다. 그는 ‘인랑’뿐 아니라 최근 관객들의 달라진 성향에 대해 여러 모로 고민해보고 있다고 했다.

“요즘 흥행작을 보면, 관객들이 영화적인 밸런스보단 ‘재미’에 더 열광한단 생각이 들어요. 느린 전개는 견디기 힘들어한단 인상도 받습니다. 리듬과 템포를 잘 살리는 게 앞으로의 영화 만들기엔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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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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