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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남자, 까탈스런 여자?…남·녀 갈등 불 지피는 예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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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 토크 예능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의 한 장면 [사진 TV조선]

TV조선 토크 예능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의 한 장면 [사진 TV조선]

"여성 위한다"며 남녀 갈등 조장하는 TV조선 '여욱이'

지난달 22일 시작한 TV조선의 토크 예능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이하 여욱이)’는 스스로 여성을 위한 공감 토크쇼를 표방한다. 김용만ㆍ지상렬, 김가연ㆍ이국주 등 출연진이 나오는데, 이 프로그램의 그림은 항상 똑같다. 여성이 화를 내는 에피소드가 제시되고, 남성 출연진은 ‘왜 화를 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며 이를 추리한다. 여성 출연진은 답답해하며 정답을 알려준다. 이유를 알게 된 남성 출연진은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묻는다. “여자들이 정말 다 그렇냐”고.

이 프로그램은 재미를 위해 대립 구도를 더욱 극적으로 그리는데, 이 과정에서 남성은 더욱 무식한 존재로, 여성은 더욱 까탈스러운 존재가 된다. 지난 20일 방송에서 화두가 된 이슈는 ‘다른 여성의 깻잎을 떼줘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여성 출연진은 입을 모아 "절대 안 된다"고 얘기하고, 남성 출연진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고 혀를 내두른다. 결국 결론을 낸다며 한다는 얘기는 이렇다. "젓가락 가는 순간 가지 말고, 안 떨어져서 몇 번 흔든 뒤 떼 달라고 요청할 때 떼주는 걸로 하자." 이외에도 '백화점 등에서 여성이 뒤에 올 때 문을 잡아줘야 하느냐'도 이날의 화두였고, 역시 "안 된다"는 여성과 "왜 안 되느냐"는 남성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졌다.

여성 힐링시켜준다며 '유별난 존재'로 만들어

TV조선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여자를 까탈스러운 존재로 그린다. [사진 TV조선]

TV조선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여자를 까탈스러운 존재로 그린다. [사진 TV조선]

‘여욱이’가 여성을 위한 ‘힐링’ 프로그램을 표방하고 있지만, 보는 여성 시청자들의 불쾌감을 자아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올라온 한 시청자의 의견을 보자. 자신을 여성이라고 밝힌 이 시청자는 “일부 여성 연예인이 나와 모든 여성이 이렇게 유난스러운 것처럼 얘기한다”며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프로는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한 프로”라며 “여성의 입장에서 거부감이 많이 든다”고 강조했다.

남성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자아내긴 마찬가지다. ‘왜’ 남성이 여성의 심리를 들여다봐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차이로 인해 발생한 그간의 차별을 돌아본다거나 차이로 인한 남녀 간의 불화를 깨보자는 식의 간단한 설명조차 없다. 그저 여성을 유난스러운 존재로 그리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을 한심한 존재로 만든다. 시청 소감에 “왜 남자들만 나쁜 놈 만드느냐” "이 프로그램의 의도가 여자 심리 분석이냐 남자 몰아세우기냐"는 의견이 많은 이유다.

남·녀 성향 일반화해 혐오 부추겨

TV조선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속 한 장면 [사진 TV조선]

TV조선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속 한 장면 [사진 TV조선]

‘여욱이’는 더 나아가 남성의 일반적 성향을 너무 쉽게 단정하고, 이를 혐오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 20일 방송에서는 ‘소름 끼치게 싫은 남자들의 SNS 게시글’이란 주제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여성 출연진은 “좋은 시계 차고 핸들 가운데 차 마크 있고 굳이 커피 테이크아웃 잔 들고 다 보이게 찍는다”고 소름 끼쳐 한다. 한 남성 출연진은 “남자들은 그런 게 또 있어 보이고, 뭐랄까 나 혼자 고독을 공유하는 느낌”이라며 동조한다. 미안하지만, 대부분의 남성들도 이런 ‘허세샷’을 질색한다. 이는 프로그램이 재미를 위해 얼마나 쉽게 성별 간 성향을 일반화하는 의도적 왜곡을 행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프로그램의 로고는 사뭇 상징적이다.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라는 글자를 빨강과 분홍색 계열로 꾸몄다. ‘파랑은 남성, 빨강은 여성’이란 구시대적 표상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여성을 위한다고 내세우는 이 프로그램이 실은 진정 여성을 불편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자기 고백일지도 모른다.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의 로고. 핑크색 계열로 글자를 꾸몄다. [사진 TV조선]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의 로고. 핑크색 계열로 글자를 꾸몄다. [사진 TV조선]

요약하자면 이렇다. ‘여욱이’는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며 그 이유를 과장해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남녀의 성향을 부정적으로 일반화하며 남녀 갈등을 유발하고 조장하는 데 앞장 선다. 남성은 무식한 존재, 여성은 유난스러운 존재로 못 박는다. 여자가 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잘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예능을 보다 욱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노진호의 이나불]은 누군가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메일, 댓글, 중앙일보 ‘노진호’ 기자페이지로 의견 주시면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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