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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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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연일 가마솥더위다. 아니 압력솥 수준이다. 밖에 나가면 금방이라도 찜닭 신세가 될 것 같다. 예부터 없는 사람들은 여름이 겨울보다 살 만하다 했지만 요즘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에어컨 없는 여름나기는 죽을 맛이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일수록 폭염으로 인한 사망 위험성이 18%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2~2009년 서울 전역을 조사한 결과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더위 불평등이다.

더 가난해진 세상 들춰낸 영화 ‘어느 가족’ #핏줄만큼 귀중한 이웃의 가치를 새로 보다

일본영화 ‘어느 가족’이 어제 개봉했다. 잠시나마 더위를 식히는 데 안성맞춤이다. 그렇다면 납량 공포극?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굳이 분류하자면 평범한 드라마다. 현란한 스펙터클도, 화려한 특수효과도 없다.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온몸이 써늘해진다. 귀신도, 좀비도 안 나오지만 피 칠갑 액션보다 섬뜩한 이 시대의 민낯 때문이다.

‘어느 가족’은 의뭉스럽다. 할머니와 중년 부부, 아들·딸 등 가족 여섯이 환하게 웃고 있는 포스터부터 그렇다. 희미해진 대가족의 추억을 불러낼 듯하다. 하지만 영화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정반대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있다. 시쳇말로 ‘웃픈’ 장면이 연속된다. 도란도란 서로를 감싸며 일으켜주는 가족들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 작품의 원제는 ‘만비키(万引き) 가족’이다. 만비키는 물건을 사는 체하고 훔치는 행위, 혹은 사람을 뜻한다. 영어 제목도 좀도둑을 가리키는 ‘샵리프터즈(Shoplifters)’다. 영화도 첫 장부터 슈퍼마켓에서 이것저것을 슬쩍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보여준다. 한데 이 가족, 부끄러움이 없다. “가게에 진열된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망하지 않을 정도로 가져가면 된다”고 여긴다. 황당한 논리다. 아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이유도 어이없다. 아버지는 “집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나 학교에 가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홈스쿨링이 아니다. 단지 형편이 안 돼 못 보낼 뿐이다.

이 가족, 먹고 사는 법도 기막히다. 주요 수입원이 할머니가 받는 연금이다. 속되게 말해 할머니를 뜯어 먹고 산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어머니는 세탁공장에서, 이모는 유흥업소에서 나름 열심이지만 그것만으론 배를 채울 수 없어서다. 일본영화계 대표 감독으로 떠오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수상한 식구 틈새에 길에서 업어온 다섯 살 여자애를 합류시키며 이야기를 미스터리 수사극으로 몰고 간다.

이쯤 되면 알아챌 수 있다. 만비키 가족은 피를 나누지 않은 ‘가짜’ 가족이다. 각자 이런저런 곡절로 한데 모인, 그럼에도 이른바 ‘진짜’ 가족보다 도탑게 지내는 식구들이 복지국가 일본의 그늘을 들춰낸다. 아동학대·유령연금(수급 당사자의 사망을 숨기고 연금을 계속 받는 것) 등도 건드린다. 아귀가 반듯하게 맞아 보이지만 실제론 구멍이 숭숭 뚫린 일본의 오늘을 돌아본다.

‘어느 가족’은 올해 칸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남루한 일상을 버텨내는 ‘대안가족’이 전 세계 공감을 끌어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닐 터다. 전통 가족의 해체는 이미 오래된 일. 핏줄 없이 뭉친 가족을 유쾌하게 다룬 ‘가족의 탄생’(김태용 감독)이 나온 것도 벌써 12년 전이다. 급락한 출산율, 바닥 모를 실업률, 가팔라진 고령화, 급증한 이혼 등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2016년 기준 아동학대도 10년 전보다 3.6배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어느 가족’의 한 대목, “다들 조금씩 가난해지고 있네”가 가슴에 박힌다. ‘낳으면 다 엄마입니까’라는 반문도 잊히지 않는다. 고레에다 감독은 “일본은 불황으로 양극화가 심해졌다. 정부는 빈곤층을 돕는 대신 실패자로 낙인 찍고 있다”고 꼬집었다. 마치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여기저기서 “못살겠다”가 터져 나오는 요즘, 우리의 가족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피가 안 섞여도 서로서로 보듬는 이웃 간 연대는 스크린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갑자기 더위가 확 밀려온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