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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옆집엔 경사가 났다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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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윤호 기자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대표
남윤호 도쿄 총국장

남윤호 도쿄 총국장

한국도 덥지만 일본도 못지않다. 연일 일사병 주의보가 뜬다. 그래도 관광객들은 여전히 거리를 메운다. 좀 알려진 맛집은 관광객들 차지다. 예약 없이는 땡볕에 줄을 서야 한다. 2020년엔 외국 관광객이 4000만 명으로 는다고 한다. 청년취업을 봐도 호경기를 실감한다. 여러 기업에 동시 합격한 대학생들에게 정중한 사퇴 매너를 소개하는 기사가 나오는 판이다.

일본 장·단기 경기곡선 일제 상승 #2024년 이후 장기호황 예측 나와 #한국은 방향성 못 잡고 우왕좌왕 #궤도 수정 안하는 건 풍토병인가

지표가 다 좋은 건 아니다. 1분기엔 소폭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뜨뜻해진 현장과는 다소 괴리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경기 회복에 긴가민가해 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담한 경기 예측으로 주목받는 책이 있다. 제목은 『제3의 초경기(超景氣)』, 시마나카 유지(嶋中雄二)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 경기순환연구소장이 썼다. 요점은 일본의 단기·중기·장기·초장기 경기순환이 모두 상승세를 타고 있는데, 도쿄 올림픽 직후 잠시 주춤하다 2024년부터 다시 상승한다는 것이다. 4개의 순환이 동시 상승함으로써 러일전쟁 이후의 호황(1904~16)과 고도성장(1961~68)에 이은 제3의 역사적 발흥을 기대할 만하다는 주장이다. 원동력으론 대규모 건설사업, 인프라 투자 확대, 혁신에 따른 생산성 향상, 관광업 호황이 꼽혔다.

실제 아베노믹스 경기는 이어지고 있다. 기간으론 1965년 10월~1970년 7월의 ‘이자나기 경기’, 2002년 1월~2008년 2월의 ‘이자나미 경기’를 넘어섰다. 물론 경제가 쑥쑥 커졌다는 뜻은 아니다. 선진국에서 고도성장은 바랄 수 없다. 경제가 오랜 결빙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며 정속 주행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남윤호칼럼

남윤호칼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경제학에 정통해서가 아니다. 디플레 탈피라는 방향을 확실하게 잡았을 뿐이다. 그 방향성이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실무진의 정책과 결합해 국가 의사로 관철된 것이다.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도 방향성은 확고했다. 잘못된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실무진에겐 수습할 일들이 폭주한다. 우리 관료들, 참 바쁘게 일한다. 후유증·부작용 해결책 짜느라 여념이 없다. 두더지 잡기식 처방쯤은 뚝딱 만들어낸다. 경제라는 배의 선장을 맡은 분도 항해 전략에 대한 고민보다 물 새는 곳 틀어막기에 바쁘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외면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데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며칠 전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 정책의 궤도 수정 없이 항해하는 것은 자해행위다”고 말했다고 보도됐다. 그 말 역시 정부 귀에 제대로 전달됐을지 의문이다.

왜 안 바꾸고, 왜 안 바뀌는 걸까. 단순히 무능하다고만 보기엔 증상이 좀 심하다. 우선 떠오르는 가설은 집단사고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끼리 청와대에 모여 ‘우리가 옳다’는 환상에 젖어서일 수 있다. ‘무오류의 환상’은 유능하기 때문에 더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둘째, 경직된 근본주의다. 자신의 생각이 합리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울 때도 이를 정치적 신념으로 고수하려는 고집불통의 자세다. 높은 지지율 속에서도 ‘밀리면 진다’는 전투심리마저 감지된다. 경제문제를 풀 때엔 유연한 실용주의가 유리한데, 참 딱한 일이다.

셋째, 권력의 자장(磁場) 탓일 수 있다. 평소 멀쩡하던 분도 권부에 들어가면 변한다. 나침반이 극점 가까이에서 오작동하듯 말이다. 교수 출신의 전임 경제수석이 그랬다. 편의적인 통계로 ‘긍정효과 90%’ 논란을 불렀다. 그냥 교수였다면 그런 리포트를 낸 학생에게 F를 줬을 텐데, 굳이 틀린 게 아니라 하잖나.

넷째, 이 정부가 열렬한 서포터들에게 포획당했는지도 모른다. 무슨 무슨 거룩한 이름의 단체들이 한 말씀 하면 반응을 곧잘 한다. 때로는 권력이 하이재킹당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자신이 없어서인가, 한통속이어서인가, 뭔가 빚을 져서 그런가. 이도 저도 아니면 그 모든 게 뒤섞인 풍토병일 수 있다. 이게 좌파 정권만의 고질병은 아니다. 권력의 역량과 비전에 따라 피해갈 수도, 걸릴 수도 있다. 불행히도 지금은 심하게 걸린 듯하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우리 경제는 일본에 비해 위태위태해 보인다. 땀 흘려 일하는 분, 일자리 만들며 사업하는 분보다 여기저기 참견이나 하는 건달들이 더 설친다. 경제 주체가 각자의 생업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2%대 후반의 성장률이 전 정부에 비해 뭐가 나쁘냐는 항변은 안 먹힌다. 경제 주체들이 민감하게 느끼는 건 흐름이다. 어디론가 잘못 가고 있다, 배가 기울고 있다…. 그런 불길한 추세적 느낌 말이다. 일본의 성장률은 우리보다 낮지만 추세가 긍정적이다. 게다가 앞으론 더 좋아진다고 하지 않나. 옆집엔 경사가 났다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썰렁하게 지내야 하나.

남윤호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