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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ISD 첫 패소로 730억 날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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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논설위원이 간다] 안혜리의 뉴스의 이면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졌다.”

[안혜리의 뉴스의 이면] #한국, 이란 다야니에 ISD 첫 패소 #상대 소송비용까지 세금으로 나가 #금융위 “원래 없는 자료, 소송할 것” #ISD 전담 상시 조직 만들어야

지난 6월 7일 한국 정부가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 이란의 다야니 가문에 패소해 세금 730억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 국내의 내로라하는 국제중재 변호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가 제기한 5조 원대 ISD 판정을 앞두고 있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등이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제기한 1조 원대의 ISD 제소를 당한 상황이다. 이 와중에 비교적 쉽게 이길 거라 봤던 사건으로 한국 정부의 첫 ISD 패소 기록이 쓰여진 것만도 충분히 아프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패소 자체보다 패소 사유가 한국의 신뢰도와 관련해 더욱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우리 정부가 왜 쉬운 싸움에서 어이없이 졌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봤다.

지난달 7일 다야니 ISD건의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가 패소 소식과 함께 730억원 지급 결정만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정부가 중재판정부의 ‘불리한 추정(adverse inference)’ 판단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불리한 추정이란 고의로 관련 정보를 숨긴 당사자에 내리는 일종의 페널티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6월 8일 전 세계 국제중재 변호사들이 구독하는 유력 영국 중재 전문지인 국제중재저널에 ‘한국의 뼈아픈 패배’라는 제목의 장문의 기사가 떴다. 187쪽에 달하는 판정문 일부와 다야니측 법률 대리인의 인터뷰를 담은 이 기사에는 한국이 서류 제출과 관련해 ‘불리한 추정’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사에는 중재판정부가 다야니측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에 2010년 12월에서 2011년 3월 사이 작성한 공적자금관리위원회 관련 서류 제출을 명령했으나 한국은 "없는 서류"라고 주장하며 이를 내지 않았고 결국 중재판정부로부터 ‘불리한 추정’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서류 미제출은 불리한 자료를 고의로 숨긴다는 의미가 깔려있기에 단순히 한 건의 패소를 넘어 다른 중재인에게 한국 정부가 잘못했다는 인상을 줘 신뢰도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ISD에 밝은 변호사들은 “중재는 양측 간 신뢰 원칙에 기반하는 것이라 서류 미제출은 중대한 패소 사유”라며 “금융위 주장대로 원래 없는 서류라면 중재판정부를 상대로 제대로 설득했어야 하는데 안이하게 대처하다 패소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 윤창호 구조개선정책관은 “다야니 측과 비밀 유지 협약이 맺어져 있어 판정문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며 “다만 고의로 서류를 내지 않은 게 아니라 원래 없는 서류인데 중재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융위 윤상기 구조개선정책과장은 “ISD는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민간 기업의 비신사적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 규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국법원에 제기할 중재 취소소송 결과가 나오는 올 연말이나 내년 초면 자연스레 공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 대형 로펌인 프레시필즈와 함께 정부측을 대리하는 율촌의 김세연 변호사 역시 “한국이 걸려 있는 다른 ISD 등을 감안할 때 국가 신뢰도를 위해서라도 비밀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국제중재 변호사는 “ISD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공개하는 추세”라며 “중재 과정에서의 잡음을 피하기 위해 심리 절차나 자료를 비공개로 하는 것은 흔히 있지만 국민 세금과 직결된 만큼 지급 액수가 적힌 판정문까지 공개하지 않는 것은 드물다”고 말했다. ISD에 밝은 국제중재 변호사들은 대체로 “상대가 이미 판정문 일부를 공개해 전 세계 중재인들이 한국 정부에 불리한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일 우려가 큰 상황인데도 우리 정부가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건 ISD 관련 법률적 전문성이 떨어지는 금융위의 미숙한 행정 처리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 홍수정 사무관(변호사)은 판정부의 자료 추가 요청이 없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통상 판정부는 같은 사안에 대해 두 번 명령하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한 로스쿨 교수는 “외국에 비해 한국 행정체계는 결코 허술하지 않아 웬만한 건 방어가 가능하다”며 “문제는 주무 부처의 미숙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유명한 외국 로펌을 쓴다 해도 결국 정무적 판단은 정부 주도로 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외국처럼 상시 대응하는 부서를 두고 전문인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이와 정반대다. 전담부서는커녕 당장 금융위만 해도 담당 사무관을 제외하고 과장과 국장 모두 최근 1년 이내에 바뀌어 향후 취소소송에서도 전문성을 갖고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지난 4월 이 자리를 맡은 윤 과장은 “채권단은 공무원 조직이 아닌데 어떻게 10년도 더 된 자료를 갖고 있겠느냐”며 “사기업이 문서 대신 전화로 의사결정 하는 게 당연한데 서류가 없다고 우리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린 걸 보면 판정부가 처음부터 부당한 편견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론스타가 제기한 ISD 관련 정부측을 대리했던 법무법인 태평양의 김갑유 변호사는 “국제분쟁은 국내 소송과는 다르다”며 “적법성은 기본이고 이를 입증하고 방어할 서류를 미리 갖춰놔야 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서류를 축적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한편 당장 불거진 서류 고의 미제출 혐의를 털어내지 않으면 한국이 글로벌 투자자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은 올해 들어서만 벌써 4건의 ISD 소송을 당했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등은 정부 정책 뒤집기 탓에 글로벌 투자자들의 집중적인 ISD 공격을 받았지만 그런 결정적 사유가 없는 국가가 한 해에 4건이나 제소당한 건 이례적이다.

우리 정부의 일관성 없는 ISD 대응도 문제다. 한국은 양국간 투자협정(BIT) 등 100여개의 무역 관련 협정을 맺고 있는 만큼 ISD와 관련해 보다 일관되고 체계적인 대응전략이 필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처음 ISD를 제기한 건 론스타였다. 법무부 주도로 글로벌 유명 로펌인 아널드앤드포터와 한국 법무법인 태평양이 법률 대리를 했다. 3년여에 걸친 심리 과정을 통해 관련 노하우를 축적했지만 정부는 이후 ISD 건마다 각기 다른 부처가 각기 다른 로펌을 고용해 대응했다. 국세청이 주도한 하노칼 건은 김앤장, 이번에 패소한 다야니는 금융위 주도로 율촌, 그리고 최근 제기된 엘리엇 건은 법무부 주도로 광장이 각기 맡았다. 한마디로 정부 차원의 ISD 노하우가 집약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ISD에 정통한 국내 로스쿨 교수는 “국민 세금을 들여 대형로펌을 돌아가면서 교육만 시키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정상적인 의뢰인이라면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을 선임해야 하는데 싼 수임료로 결정하다 보니 결국 국민이 불필요한 세금을 부담하게 됐다”는 말이 아프게 와닿는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