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온종일 답답하게 나를 옥죄고 있던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는 일이다. ‘하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 나를 감싼다. 기록적인 폭염 탓에 가뜩이나 불쾌지수가 높은 요즘, ‘노브라’로 출근하고 싶은 충동이 종종 생긴다. 실천에 옮기자니 용기가 좀 부족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노브라로 산다는 건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네 가슴에 신경이나 쓰는 줄 아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고 하면 해결될 문제일까. 정말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까.
가수 겸 배우인 설리는 얼마 전 자신의 SNS에 또 노브라 사진을 올렸다. “열심히 돌아다닐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2년 전부터 이런 사진을 올려온 그녀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화제가 되고 어김없이 성희롱성 악플이 달린다. 그녀를 ‘관종’으로 치부하기 전에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를 비롯한 일반인과 그녀의 가장 큰 차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느냐 안 하느냐다. 나란 사람은 노브라에 얇은 옷차림이면 동네 슈퍼만 가도 위축이 된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좀 움츠린다거나 괜히 팔짱을 끼게 되는, 그런 거 말이다. 노브라는 유별난 것, 남의 이목을 끄는 것이란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는 식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대다수의 여자는 왜 이렇게 설계됐을까를 고민해보자. 나의 경우 고등학교 때까지 브래지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 대학 때 브래지어 착용이 건강에 좋을 게 없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집에서라도 벗고 지내기 시작했다.
환경적인 요소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는 계기도 있었다. 얼마 전, 여름 휴가차 스페인에 갔는데 노브라로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곳에선 나도 용기가 생겼다. 아니 용기라는 표현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탈 코르셋 운동이나 나체주의, 자연주의 뭐 이런 거창한 담론을 주창하는 게 아니다. 모두에게 노브라를 강요하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주제의 글은 하도 오해를 많이 사서 굳이 요약하자면, 브래지어 착용이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이 되도록 하기도 여전히 어렵다는 얘기다. 언젠가 태어날 내 아이에게 “브래지어라는 건 네가 하고 싶을 때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말이다.
김경희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