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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도둑맞은 가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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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최악의 열대야 시작됐다’.

어제(24일자) 중앙일보의 폭염 관련 기사 제목이다. 벌써 7일째 서울의 한낮 기온이 33도를 웃돌고 최저기온마저 29.2도를 기록해 111년 관측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그런데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란다. 올여름 들어 사망자 11명을 비롯해 벌써 1000여 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한 걸 보면 이미 재난 상황에 돌입했다고 봐야 옳다.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폭염에 기진맥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데, 집에 에어컨은커녕 열기를 피해 마땅히 갈 곳조차 없는 취약계층 사람들은 오죽할까. 국민의 녹을 먹는 이라면 무더위를 식힐 창조적 발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재난 수준에 걸맞은 보호 조치를 찾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와중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관사를 놔두고 굳이 “서울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달동네(강북을 박용진 의원)”라는 서울 강북구 삼양동의 월세 200만원짜리 한 달 옥탑방살이에 돌입했다. 현장 행정을 내세운 이른바 서민 체험이다. 박 시장은 “집중적으로 강남·북 격차 해소를 위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며 이곳에서 연구하고 책을 읽겠다고 한다.

서울의 어느 달동네 옥탑방에서는 더위를 못 이겨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데 정작 그런 사람을 구제할 방안을 찾느라 온 힘을 쏟아도 부족할 시장은 웃돈 얹어 일부러 에어컨 없는 방에서 땀 흘리며 고민하고 책을 읽겠다니, 뭔가 이상하다. 아내가 아닌 보좌진과 동거하는 옥탑방살이를 놓고 세금 낭비니 행정 낭비니 뒷말이 많다. 어찌 보면 이런 논란은 곁가지다. 돈 걱정에 당장 더위 피할 엄두조차 못 내는 진짜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동시에 이런 삶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폭염 속 옥탑방을 낭만적 공간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게 진짜 문제다.

박완서가 1975년 발표한 ‘도둑맞은 가난’엔 가난에 온 가족을 잃은 어린 여공이 등장한다. 비슷한 처지로 알고 동거했던 상훈이 가난 체험에 나선 부잣집 대학생이라는 걸 알고 이렇게 내뱉는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이제라도 옥탑방 생활을 접으라 권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상훈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절망감만 안겨줄 터이니.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