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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계엄 납량특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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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3주 전 이 자리에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고 썼다. 21세기의 지구마을에서 황제나 차르·술탄, 심지어 파라오까지 되려는 자들이 발호하는 현실이 기막혀 한 말이었다. 기원전에 사라진 파라오는 말할 것도 없고 차르·술탄·황제 역시 유행 지난 촌스러운 패션인데도 장롱 구석에 처박힌 그 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는 모습들이 가소로워 꺼낸 얘기였다. 그들에 비하면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들은 차라리 ‘패셔니스타’였던 거다.

부역자들이 키우는 절대권력 망령 #정신 안 차리면 언제고 고개 든다

유행이란 시대정신(zeitgeist)을 말한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신이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일곱 살에 퇴위한 게 1912년이다. 83일 천하를 누린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끼워줘도 1916년이 끝이다.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살해된 게 1918년, 오스만튀르크의 마지막 술탄 압둘 마지드 2세가 쫓겨난 게 1922년이다. 절대군주를 용인하는 시대정신이란 20세기 초반에 이미 재가 됐단 얘기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오늘날 그 유령들이 관 뚜껑을 열고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으니 이게 뭔 조화란 말이냐. 행여 우리도 그런 ‘권위주의 축(authoritarian axis)’에 끼게 될까 걱정한 할머니 마음이 3주 전 칼럼이었다.

맙소사! 그런데 그게 정말 현실이 될 뻔한 거였다. 광화문 앞에 탱크가 진주하고, 국회·국정원을 계엄사령부가 통제하며, 빨간 펜 검열관들이 언론사에 똬리를 틀고, 집회·시위와 반정부 활동이 일절 금지되는데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구속되는, 그래서 의결정족수를 못 채워 계엄 해제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게 박근혜 탄핵심판이 헌재에서 기각돼 전국이 시위로 들끓는 사태에 대비한 국군기무사의 대비전략이라는 거였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알겠다. 늘 그런 거다. 절대권력이란 권력자 한 사람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권력에 빌붙어 단물 빨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진드기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권력자가 시대착오적 망상에 쉬이 사로잡히는 것도 그들의 부추김 때문이다. 권력을 한 사람이 틀어쥐고 있어야 단물을 빨기 쉬워서다. 오래 쥐어야 오래 빨 수 있음은 물론이다. 온 나라가 반정부 시위 물결로 넘친다면 대통령이 물러나는 게 맞을진대, 그들은 계엄이라는 헌 칼로도 그 물결을 막고 싶은 것이다.

기무사 계엄 문건에 청와대가 목청 높이는 게 찜찜하고 여당의 ‘쿠데타’ 주장도 지나친 측면이 있지만 권력 부역자들의 희망이 문건에 담겼음은 분명하다. 당시 권력자와 그 주변을 볼 때 희망의 실현(적어도 시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래서 아찔한 거다. 문건대로 됐다면 우리 역사는 40년 전으로 돌아가는 건데 과연 거기서 멈췄을까. 내친걸음에 그 악명 높던 ‘긴급조치’의 시대로, 나아가 시위대에 총을 난사하던 4·19 시절로까지 급발진 사고처럼 후진하진 않았을까.

그런 반동이 오래도록 지속 가능할 리는 만무하다. 다시 말하지만 유행이 지났기 때문이다. 아무도 입고 싶어 하지 않는 옷이 팔릴 리 없고, 억지로 입힌대도 곧바로 구멍 나고 말 게 뻔하다. 그 다음에 억지로 입힌 사람이 무사할 리 없다. 국민의 심판을 받지 않으면 부역자들의 내부 다툼 속에서 희생되고 말 것이다. 반복되는 역사는 예상하기도 쉽다. 하지만 그 사이 골병드는 건 국가요, 멍드는 건 국민인 것이다. 그런 어이없는 망상이 한여름 밤 납량특집으로 끝난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절대권력의 망령은 언제고 또다시 고개를 들 게 분명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