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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실’ 만들고 출고 제품 괴롭혀 수만 번 실험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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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호 16면

“기능적으로 뛰어나면서도 아름다운 오디오 기기를 만들어 고객의 삶을 풍요롭게 하자는 게 목표예요. 93년 전 창업자들이 세운 철학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뱅앤올룹슨’ 헨리크 클라우센 CEO #트렌드 변화 모르고 있다 길 잃어 #개방형 플랫폼으로 바꿔 되살아나 #디지털 대응 늦어 한때 주가 폭락 #직원 3000명서 800명으로 축소 #제조는 LG 등 글로벌 업체에 외주 #디자인·기술력·장인정신에 집중 #독창성 위해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 #‘엑스트라’ 노력해야 경쟁사 앞서

덴마크 명품 오디오 기업인 뱅앤올룹슨(B&O)을 이끄는 헨리크 클라우센 최고경영자(CEO)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목표가 명확했기 때문에 우여곡절을 버틸 수 있었고,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뱅앤올룹슨은 독자적인 오디오 기술과 북유럽 감성의 디자인을 갖춘 제품으로 세계적인 홈 엔터테인먼트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하이엔드 오디오·스피커·TV·헤드폰·이어폰 등 음향 관련 기기를 만드는 전문 기업이다.

뱅앤올룹슨은 덴마크 왕실이 유일하게 인정한 오디오 브랜드이다. 뛰어난 디자인과 미학적 예술성을 인정받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제품 16점이 영구 소장돼 있다.

덴마크 명품 오디오업체 뱅앤올룹슨(B&O)의 헨리크 클라우센 최고경영자(CEO)는 ’디자인, 고급 소재, 사운드 기술 등 핵심에만 집중한 결과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덴마크 명품 오디오업체 뱅앤올룹슨(B&O)의 헨리크 클라우센 최고경영자(CEO)는 ’디자인, 고급 소재, 사운드 기술 등 핵심에만 집중한 결과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검은색 박스 안에 숨겨져 있던 CD플레이어를 밖으로 노출해 오디오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베오사운드 9000’(1995년)은 6개의 CD가 들어가는, 마치 피아노 건반을 연상시키는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TV를 예술 작품을 담은 액자 형태로 만든 ‘베오 비전’(2005년)도 TV 디자인 역사에서 상징적인 제품이다.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잃지 않으면서 디지털 기술을 적용한 제품들이 인기다. 매출액의 절반 이상이 ‘커넥티드 오디오’ 제품군에서 나온다.

뱅앤올룹슨은 1998년 국내에 처음 진출했다. 한국은 덴마크 본사가 눈여겨보는 시장이다. 클라우센 CEO는 “서울 압구정동 플래그십 스토어는 세계 700여 개 매장 중 매출 상위 5위 안에 든다”고 말했다. 한국 진출 20주년을 맞아 최근 방한한 클라우센 CEO를 이 매장에서 만났다.

덴마크 왕실이 인정한 오디오 브랜드

한국인들이 뱅앤올룹슨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한국 소비자는 디자인과 장인 정신을 알아보는 안목이 높다. 브랜드 헤리티지까지 폭넓게 살피며 굉장히 세심하게 제품을 고른다. 뱅앤올룹슨은 사운드, 디자인, 장인 정신 세 가지가 잘 결합해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데, 그런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다. 한국 진출 20주년을 기념한 ‘코리아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할 정도로 본사가 한국 시장에 신경을 쓴다.”
최근 회사 성장세는 어떤가.
“최근 몇 년간 해마다 10~12%씩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 정도 성장률을 예상한다. 대형 스피커 등 클래식한 제품들뿐 아니라 헤드폰·이어폰 등 새로운 카테고리로 계속해서 확장할 계획이다. 최근 몇 년은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회사 전체 역사를 살펴보면 ‘업 앤 다운’이 있었다.”

뱅앤올룹슨의 전성기는 2000년대 중반에 찾아왔다. 베오사운드 9000 같은 혁신적인 신제품을 잇달아 내놓으며 승승장구했다. 2006년 말 주가는 357 덴마크 크로네(약 6만3000원)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주가가 무섭게 내려가기 시작해 2008년 말에는 28 덴마크 크로네(약 5000원)까지 떨어졌다. 2년 새 기업 가치가 10분의 1 이하로 폭락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 때문이었나.
“금융 위기보다는 회사 내부 구조적인 문제가 더 취약했다. 하이엔드 스피커가 주력 상품이었는데 그것만으로 소비자를 만족하게 하기엔 부족했다. 새로운 상품군을 소개하지 못하니 고객들이 점점 브랜드와의 ‘연관성(relevance)’을 잃어갔다. 소품종 소량 생산으로는 사업 규모를 키울 수가 없었다. LG가 TV 2500만 대를 만들 때 우리는 1만 대 정도 만들었다. 덴마크의 작은 공장에 머물려면 모르겠지만, 세계적인 기업이 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해법을 어떻게 찾았나.
“우리가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했다. 디자인, 혁신, 고급 소재에 대한 이해, 사운드 기술은 우리가 이어 나가야 할 본질적인 영역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이디어에만 집중하자는 것이다. 그 외 하드웨어 등 생산 영역은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했다. 우리보다 더 싸게, 더 잘 만들 수 있는 글로벌 제조업체와 손잡았다. 스마트 TV는 LG전자와 공동 개발했고, 중국·대만 등에서 제품을 만든다. 덴마크 본사 인원이 최고 3000~4000명이었는데, 지금은 800명으로 운영하고 있다.”
덴마크 제조의 정체성을 잃는 것은 결국 손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첫째, 아시아 제조업의 품질은 매우 높아졌다. 둘째, 고급 기술 영역은 덴마크에 남겨뒀다. 덴마크에 특별 생산시설 두 곳이 있는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만한 경쟁력을 못 찾았기 때문에 생존했다. 250명의 기술자가 특화된 고급 알루미늄 표면 처리나 특수한 기계적인 작업을 한다. TV·스피커 등에 들어가 고급스러운 느낌을 내는 재료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대응도 늦은 편인데.
“독자적인 플랫폼을 고수한 것도 패인이었다. 뱅앤올룹슨 제품은 우리 생태계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객은 자기가 소유한 스마트 기기를 뱅앤올룹슨 스피커와 연결해 디지털 음원을 스트리밍해서 듣고 싶어 하는데, 대응하지 못했다.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데, 우리는 세상 변화를 읽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다.”
다시 길을 찾은 방법은.
“폐쇄형 시스템을 개방형으로 바꿨다. 고객이 원하는 환경에서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마존이든 구글이든, 텐센트·네이버 등 고객이 무엇을 통해 연결할지 정하고 우리는 운영만 하도록 전략을 바꿨다. 제품 카테고리도 늘렸다. 트렌드 변화에 맞춰 블루투스 스피커 등 이동형 제품 ‘온 더 고(On the go)’ 상품을 확 늘렸다. 합리적인 가격대의 세컨드 브랜드 B&O 플레이도 만들면서 성장 궤도에 올랐다.”

한국 진출 20주년 기념 에디션 출시

클라우센 CEO는 “어려움을 겪고도 다시 도약할 수 있었던 건 디자인, 기술력, 장인 정신이라는 핵심 경쟁력 세 가지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문실(Torture Chamber)’이라고 불리는 실험실에서 수만 번의 실험을 통해 최상의 퀄리티를 가진 제품을 만든다. 가령 리모컨의 경우 제품 사용 기간인 10년 동안 사용되는 수치만큼 버튼을 누르는 실험을 하는 등 제품을 ‘괴롭히며’ 능력을 테스트한다.

음파의 미세한 단점도 찾아낼 수 있도록 훈련된 ‘황금 귀’ 청각 평가단은 모든 음향 컨셉에 대해 최종 평가 및 승인을 한다. 기술 설비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그때그때 마음과 기분에 의해 좌우되는 주관적인 인간의 청각에 더 완벽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다. 모든 음향 제품은 뱅앤올룹슨 소유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음향 측정시설에서 단계별 개발 과정을 거친다. 엄격한 시력 테스트를 통과한 일반인으로 구성된 ‘화질 감정단’은 기계가 놓치는 부분을 보완한다.

디자이너들이 독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내 디자이너를 고용하지 않고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한다. 혁신에 대한 뱅앤올룹슨의 열망을 보여주는 몇몇 장치들이다. 클라우센 CEO는 “경쟁자보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추가(extra)’의 노력을 더 하는 게 결국 큰 차이를 만든다”고 말했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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