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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트럼프 ‘거래의 기술’ 왜 힘 못 쓰나 … 북한 협상의 불패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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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미국은 북한을 모른다

트럼프는 거래다.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은 그의 책이다. 그의 명성의 바탕이다. 하지만 그 평판은 헝클어졌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부실한 성적 탓이다. 회담 이래 한 달이 지났다. 미국은 위축됐다. 회담 전까지 백악관은 결연했다. ‘담판, 속전속결, 일괄타결’이라고 했다. 회담 후 그런 어휘는 밀려났다.

싱가포르 회담 부실 성적은 #북한알기 소홀, 상대방 깔본 탓 #부동산과 ‘김정은 다루기’ 달라 #트럼프, 한·미 훈련 중단 했지만 #북한은 이득 뒤 ‘먹튀’ #유해송환, 비핵화 초점 흐리기 #북한도 예측 불가 기습에 허점 #미국이 역전 기회 찾으려면 #조이·갈루치·힐 경험 전수받고 #북한 잘 아는 한국 도움 받아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기세는 꺾였다. 그가 ‘칠면조 요리론’을 꺼낼 때부터다. CVID(완전, 검증 가능,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의 압박 카드는 증발했다. 그는 17일 “(북한 비핵화의) 시간, 속도 제한은 없다. 서두르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어술은 교묘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18일 “트럼프도 별 수 없네, 김정은에게 속은 거지요”라고 했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말은 실감난다. “트럼프 대통령이 거래의 기술자라고 해서 지켜봤는데 결국 수완이 미덥지 않았고, 어설픈 사업가로 드러났다.”

트럼프는 우긴다. “막후에서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싱가포르 합의문은 아름다운 문서다.” 그것은 변명과 자화자찬이다. 그는 “지난 9개월간 핵실험도, 로켓 발사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 핵·미사일 실험은 필요 없다. 북한은 지난해 말 핵 무력을 완성했다. 거래의 기술은 거래의 포장술로 바뀐 듯 하다.

젊은 영도자의 이미지 변신은 뚜렷하다. 그는 잔혹한 세습 독재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북한의 핵무장은 국제적 공인을 받은 셈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세 번째 평양에 갔다(6일). 그는 김정은을 만나지 못했다. ‘빈손’ 귀국이었다. 그것은 북한의 상투적인 냉담이다. ‘먹튀(welsher)’는 거래술의 중요 요소다.

북한 협상술의 7대 구성 요소 (6·12 싱가포르 회담)

북한 협상술의 7대 구성 요소 (6·12 싱가포르 회담)

“북한은 상대방이 낙관과 환멸·실망 사이를 오락가락하게끔 협상 과정을 조작한다. 실망한 상대방은 다음번에 북한이 협조적 자세로 나올 거라는 부질없는 환상에 부푼다(척 다운스 『북한의 협상전략』).” 그 책의 번역자는 송승종 대전대 교수(군사학)다. 그는 “폼페이오 장관이 그런 처지가 된 듯하다”고 했다.

한의 협상술은 불패의 신화다.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은 “미국은 북한과의 교섭에서 이긴 적이 없다”고 했다. 신화는 확장됐다. 비핵화 협상은 난항이다. 김정은의 시간표 속에서 움직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미국의 미숙함과 좌절은 반복되는가. 원인은 지피지기(知彼知己)의 부족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손자병법』의 그 구절은 예외 없다.

북한의 트럼프 연구는 철저했다. 트럼프는 직감과 변칙을 구사한다. 실무팀은 그의 언어 습관, 거래 방식을 추적했다. 김 위원장은 배짱과 전술을 단련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알기에 게을렀다. 원로 북한 전문가인 강인덕의 분석은 이렇다. “북한을 상대한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치밀한 전술도 짜지 않은 채 나왔다. 대북 협상은 트럼프의 부동산 계약과 다르다. 돈 갖고 흥정이 안 되는 미묘한 부분이 있다.” 송승종은 손자의 경적필패(輕敵必敗)로 분석한다. “북한이 핵을 가졌지만 가난한 만큼 강대국 위세로 적당히 누르고 구슬리면 될 것이라고 얕잡아 봤다.”

김정은-트럼프의 대좌는 반전(反轉)의 드라마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회담을 취소했다(5월 24일). 그 직후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의 담화가 나왔다. “조·미 수뇌상봉(북·미 정상회담)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 6월 1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워싱턴의 백악관을 방문했다.

북한의 낭패와 좌절 사례

북한의 낭패와 좌절 사례

트럼프의 거래 원칙은 선명하다. “협상을 할 때 최악은 절실해(desperate)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당신의 피냄새를 맡고, 당신은 죽는다.” 트럼프는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싱가포르 회담은 살아났다. 그는 낙관과 기대치를 높였다. “회담은 성공할 것이다.” 입장이 바뀌었다. 이제 ‘절실’한 쪽은 미국이다. 정상회담 직전까지 폼페이오는 CVID를 압박했다. 북한은 벼랑 끝 수단으로 버텼다. 트럼프는 CVID를 포기했다. 그 대신 ‘한반도 비핵화’로 대치했다.

북한의 ‘살라미(salami)’ 전술은 진화했다. 그들은 시공간을 나눠 자른다. 트럼프의 “단 한 번의 기회”를 쪼갰다. 거래 대상도 분리한다. 핵무기·시설·물질로 분산시킨다. 그들은 미사일 엔진실험장 폐쇄를 흘린다. 미국의 우선 관심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북한의 화성-15형은 미국 본토를 위협한다. 그것은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를 겨냥했다. 북한은 종전 선언을 비핵화 협상에서 떼어낸다. 종전 선언은 평화협정, 북·미 수교의 출발점이다.

럼프의 거래 무기는 레버리지다. 그의 거래술은 “레버리지 없이 협상을 하지 말라”다. 하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원칙을 위배했다. 한·미 연합훈련의 레버리지를 버렸다. 그는 “워 게임(war games)을 중단해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절감했다”고 주장했다. 천영우(전 6자회담 대표)는 “한·미 연합훈련 중단은 북핵 동결과 연계할 만한 레버리지인데 포기의 악수(惡手)를 뒀다”고 했다.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을 험악하게 비난했다. 중단은 선제적 양보다. 하지만 북한은 평가절하한다. “큰 양보처럼 광고했지만··· 재개될 수 있는 극히 가역적인 조치.” 북한의 그런 반응은 상습적이다. 양보하면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한다. 트럼프의 과거 부동산 세계와 다르다. 북한의 교섭은 주고받고식이 아니다.

평양은 폼페이오를 길들이려 한다.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8일 외무성).” 욕설은 심리전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일을 완성하려는 서양 사람 특유의 조급성(impatience)을 이용한다(C. 터너 조이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조이는 1953년 휴전협상의 미국 대표였다. 그 책은 대북 협상 실수와 좌절의 처절한 고백이다. 모욕은 조급성을 유도하는 수법이다.

"논점을 흐려라(red herring).” 조이 제독이 간파한 북한 전술이다. 북·미 유해(遺骸) 송환 협상이 그것이다. 유해는 비핵화의 본질이 아니다. 북핵 전문가 로버트 갈루치가 경계했던 ‘미끼상품(bait and switch)’이다. 북한은 쟁점을 딴 곳으로 슬며시 돌리려 한다.

이런 상황은 미국의 자업자득이다. 지피지기에 소홀한 대가다. 협상팀의 경험·관록에서 차이가 크다. 김영철(72)은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가 데뷔한 것은 1990년(남북 고위급회담)이다. 김계관(75)은 막후에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 등장했다. 평양 올드보이들의 노하우는 재생산되고 이어진다. 북한 실무팀은 치열하고 집요하다. 협상은 그들에게 전쟁의 다른 수단이다.

폼페이오(55)는 수재다(웨스트포인트·하버드대 로스쿨 수석 졸업). 하지만 그에게 북한은 낯설다. 그의 그런 면모가 노출된 적이 있다. 그는 김정은을 ‘Chairman Un(은 위원장)’이라고 했다. 한글의 성(姓)·이름 순서를 착각했기 때문일까. 2014년 갈루치의 반성은 유효하다. “당시(1994년 제네바 북·미 회담 수석대표 때) 우리는 북한에 대해 무지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에도 백악관·국무부의 담당자 대부분은 북한을 모른다.

양의 교섭력은 무적인가. 망가진 적도 여러 번이다. 그들도 예측불허, 기습, 역발상에 당했다.

1984년 9월, 집중호우가 내렸다. 북한은 수재민 지원의 뜻을 표시했다(쌀 5만 섬, 시멘트 10만t, 포목 50만m). 북한은 오판했다. 한국이 그 제안을 거부할 것으로 믿었다. 노신영 안기부장(현 국정원장)의 역발상은 절묘했다. “한국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월등함을 국제사회가 안다. 구호품 수락으로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다. 자신감을 보여줄 기회다.” 전두환 정권은 역습에 나섰다. “구호물자를 받겠다.” 평양은 당황했다. 경제난 속에서 물품 마련에 생고생을 했다. 북한의 어두운 실상이 폭로됐다. 물자 제안은 김정일의 아이디어였다. 북한은 허(虛)를 찔렸다.

독재체제의 아킬레스건은 통치자금이다. 2005년 9월 미국 재무부는 그곳을 쳤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에 금융제재를 했다. BDA의 북한 계좌가 동결됐다. 거기에 김정일의 비자금이 들어 있는 듯했다. 평양은 기습을 당했다. 김계관은 “피가 마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금 동결이 풀리지 않으면 6자회담이 어렵다”고 했다. 상대는 국무부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 김계관의 벼랑 끝 압박에 힐은 밀렸다. 2007년 6월 계좌는 풀렸다. 북한은 BDA 족쇄에서 벗어났다.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식 벼랑 끝 결단이다. 그 무렵 미국과 중국·북한은 휴전에 속도를 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격은 치밀했다. 세계가 경악했다. 미국은 이승만을 달랬다. 한·미 동맹 체제(상호방위조약 체결)가 짜였다. 그것은 북한의 전후 구상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그해 11월 리처드 닉슨(부통령 시절)은 한국을 방문했다. 『닉슨(대통령) 회고록』은 ‘노(老)정치가의 현명함’을 기억했다. “공산주의자와 거래하는 데 ‘예측 불가능성’이 중요하다(importance of being unpredictable)는 이승만의 통찰은….”

미국은 후퇴했다. 하지만 재역전의 기회는 있다. 그것은 비핵화의 로드맵 협상이다. 미국은 무수한 교섭 실패와 침체의 경험을 갖고 있다. 조이·갈루치·힐의 노하우는 설득력있고 풍부하다. 그것이 트럼프 행정부에 학습효과로 전수돼야 한다. 트럼프는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석’과의 제휴도 활발해야 한다. 북한의 거래수법에 같은 민족 한국인은 익숙하다. 한국은 북한을 잘 안다.

박보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