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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기금운용본부, 위기의 국민연금 장기 수익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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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위 분들에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한 번 해보시라’고 권하면, ‘현직에 잘 있는데 왜 하겠느냐, 갈 데 없어지면 그때나 생각해본다’고들 합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퇴직자 4인 인터뷰] #"임기 짧은 CIO, 장기 전략보다 1년 성과 급급" #"민원 투자까지…장기 수익률, 이대론 안 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운용직으로 일했던 A씨의 말이다. A씨는 국민연금 운용의 가장 큰 적으로 ‘짧은 CIO 임기’를 들었다. 그는 "임기가 기본 2년에 1년 연장 가능한 수준이고, 임기를 마치면 3년간 관련업종 취직이 안 되니 국민연금 CIO는 사실상 커리어의 끝"이라며 "연금은 장기 투자를 해야 하는데, CIO가 1년이라도 더 일하려면 성과가 있어야 하니 단기 이익을 목표로 투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본지가 접촉한 국민연금 출신 민간 자산운용업계 종사자들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애정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다가 좌절한 경우들이 많아서였는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역량만큼의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이유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포트폴리오 바꿔야 하는데…구멍난 핵심 운용역 자리

이들은 특히 현재의 시스템과 이로 인한 주요 보직 공백이 국민연금의 장기 수익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 목소리로 우려했다. A씨는 "당장 채권실장이 주식실장을 겸직하고, 해외대체실장도 대행으로 1년 넘게 가고 있다. 시니어가 겪은 경험·전문성이 후배들한테 전파되면서 굴러가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좋은 인력 자원이 없어진다는 것은 국민연금이 서서히 안 좋은 길로 간다는 이야기"라며 "연금은 2030년~2040년까지 내다보고 운용해야 하는데, 의사 결정을 빨리빨리 해야 하는 대체투자가 어려운 상황이라 장기적 전략에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해외 연기금들은 저성장·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위험자산과 해외투자 비중을 확대하는 추세다.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은 대체투자 및 부동산투자 비중이 26.3%다. 일본 공적연금 GPIF는 해외투자 비중을 2013년 25.7%에서 지난해 말 39.2%로 늘렸다. 노르웨이 국부펀드 GPFG도 2010년대 들어 유럽에 대한 투자 비중을 줄이고 아시아 등 기타 지역 비중을 늘리고 있다.

국민연금도 지난 5월 '2019~2023년 자산배분안'을 발표하면서 해외주식·해외채권·대체투자 비중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 자산은 주식 38.6%(국내주식 21.2%), 채권 50.6%, 대체투자 10.8%로 채권 비중이 높다. 2023년까지 채권 비중을 줄이고 해외주식과 대체투자 비중을 각각 30%, 15% 내외로 늘린다는 목표다.

이 때문에 현재의 포트폴리오를 손봐야 할 시점이지만 투자 판단을 해야 할 핵심 운용역들이 빠져나간 구멍이 크다. 특히 대체투자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개별 운용역의 역량과 시니어 매니저의 판단이 필수적인 영역이다. 본부 퇴직 운용역 D씨는 "지난해는 주식 시장이 워낙 좋아서 묻어간 것이었다"며 "손을 대서 수익률을 내는 게 주식 액티브 투자나 대체투자인데, 대체투자는 지난해 추가 집행도 제대로 안 됐다"고 말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대체투자 비중은 11.4%에서 10.8%로 오히려 줄었다.

정치적 보은 투자도 수익률 제고의 적으로 지목됐다. C씨는 “정치권의 신세를 지고 오는 CIO들은 정치권에 보은을 해야 한다. 이들이 외부의 청을 다 들어주다 보면 포트폴리오가 망가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증권이나 채권 투자 같은 경우 운용사가 40~50곳씩 되니까 슬쩍 슬쩍 이해관계로 진행되는 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공단 전체 조직과 기금운용본부 간 이질감이 운용직에 부담이 된다는 말도 나왔다. A씨는 "운용직을 서포트해준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오히려 내부적으로 불이익을 더 많이 줬다"며 "기금운용본부에 대한 강도 높은 내부 감사가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퇴직자들은 "1년의 4분의 1이 감사 기간이었다" "공단 내부 감사가 감사원보다 더 유난스러웠다"고 성토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국민연금공단에서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연합뉴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퇴직자들은 "1년의 4분의 1이 감사 기간이었다" "공단 내부 감사가 감사원보다 더 유난스러웠다"고 성토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국민연금공단에서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연합뉴스]

또 다른 퇴직자 B씨는 "공단 내부 감사가 감사원보다 더 유난스러웠다"며 "온갖 트집을 다 잡아서 경고장을 날리다보니, 본부 내에서는 경고장을 많이 받을수록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자조적 인식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C씨도 "다른 조직은 보통 내부 감사가 외부 감사에 대응할 준비를 하는 차원인데, 내부 감사하는 일반직들이 운용직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심하게 말해 검찰이 피조사자 대하듯 했다"며 “국정 감사, 복지부 감사, 감사원 감사에 내부 감사까지 한 해에 집중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1년의 4분의 1을 감사받느라고 허비해야 했다”고 말했다.

운용업계도 걱정스럽게 보는 국민연금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외경[연합뉴스]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외경[연합뉴스]

운용업계의 우려도 비슷하다. 강방천 에셋플러스자산운용 회장은 "과거 10년은 주식이든 채권이든 부동산이든 누가 해도 수익이 나는 장이었다"며 "CIO 임기가 5~10년이면 장기적인 전략을 세울 텐데, 그렇지 않으니 기존 포트폴리오를 그대로 금액만 늘리는 식이 되고 위탁 운용사들도 국민연금의 벤치마크대로 패시브 투자만 한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지난해 “국민연금이 단기 실적에 치중한다”며 위탁받은 2700억원대의 펀드 운용권을 자진 반납하고, 강면욱 당시 기금운용본부장에게 편지를 쓴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운용직이 연 2%포인트 정도 수익을 더 내면 잘했다고 본다. 500조원에서 1%가 늘어나면 5조원이다. 그럼 성과급으로 운용역과 CIO가 59억원은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민간 운용사 펀드매니저는 "국민연금 인력들이 자꾸 이탈하는 건 공단 본부가 있는 전주에 내려가는 게 싫어서거나 급여가 적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라며 "나만 해도 사명감을 갖고 그런 큰 일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투자에 대한 운용역의 결정 하나하나가 정치·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온 국민의 주목을 받고 책임을 묻는 자리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이현·정종훈 기자 lee.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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