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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축구선수 아버지는 부자니 납치해" 이게 일상인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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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1 

아프리카의 한 화려한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흥겨운 결혼식. 신혼부부가 차를 타고 피로연장으로 이동하던 중 아내가 남편의 옷에서 여성용 팬티를 발견합니다. 지금 내가 본 게 뭐지….
“차 돌려. 이 결혼 취소야!”

남편이 진땀을 빼는 사이, 먼저 피로연장에 도착한 친척들의 걱정은 커지기만 합니다. 그 이유가 좀 엉뚱한데요. “납치당한 게 분명하다”는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화해하고 피로연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이번엔 강도가 들이닥칩니다.
“나는 대학을 7년이나 다니고 1등으로 졸업했어. 그런데도 일자리가 없지. 당신 같은 부자들이 알기나 해?”

이 결혼식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요?

# 사건2  

유명 음반사 사장이 클럽에서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려 이동하던 중 괴한에 납치됩니다. 얼떨결에 함께 있던 여성도 끌려가죠. 괴한들은 사장의 동업자에게 전화해 돈을 내놓으라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보다 못한 여자가 나섭니다.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요. 돈 엄청 많아요.”
알고 보니 이 나라 최고 재벌 집 딸이었던 거 있죠.

이들 남녀는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을까요?

# 사건3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기간. 중요한 경기를 몇 시간 앞두고 이 나라 축구대표팀 주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아버지를 납치했으니 몸값을 내놓으라는 협박이었죠.
손이 덜덜 떨리지만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경기를 망칠 순 없습니다. 결국 선수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경기장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같은 시각, 선수의 고국에선 그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특급 작전이 펼쳐집니다.
과연 이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나이지리아의 아메드 무사가 득점에 성공한 후 기뻐하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나이지리아의 아메드 무사가 득점에 성공한 후 기뻐하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납치’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 무대가 나이지리아란 겁니다. 1번은 이 나라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둔 영화 ‘웨딩 파티 사수 작전’, 2번은 ‘특급 납치 악몽’이란 영화의 줄거리죠.

그러나 3번은 실화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 축구대표팀 주장 존 오비 미켈이 겪은 일이거든요. 경찰은 총격전 끝에 그의 아버지를 구출했고 이 뉴스는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질 것만 같은 ‘축구선수 아버지 납치 사건’이 일어났으니까요.

존 오비 미켈 나이지리아 축구대표팀 주장 [로이터=연합뉴스]

존 오비 미켈 나이지리아 축구대표팀 주장 [로이터=연합뉴스]

충격적인 건 그의 아버지가 이전에도 납치당한 적이 있단 사실입니다.
궁금하더라고요. 어째서 국가대표 선수의 아버지가 계속 타깃이 될까, 고속도로에서 차를 탈취했다는데 이 정도면 그냥 ‘괴한’이 아니라 ‘무장조직’ 아닌가, 치안이 어떻길래 ‘총격전’이 벌어질 정도일까.

그러니까… 나이지리아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아홉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이지리아 위치 [구글 캡처]

나이지리아 위치 [구글 캡처]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서부 국가입니다. 한반도의 4배가 넘는 면적에 인구는 약 1억 8000만명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죠.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도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자원 부국입니다.

문제는 역시 양극화입니다.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넘어설 정도로 아프리카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지만, 극빈층 역시 급속도로 늘고 있거든요. 얼마 전 세계빈곤시계와 브루킹스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8700만 명이 하루 1.9달러(약 2000원)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빈층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극빈자가 많은 나라’로 꼽힌 거죠.

더 큰 골칫거리는 내전에 가까운 종교ㆍ지역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단 겁니다. 1960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이슬람을 믿는 북부(하우사족ㆍ풀라니족)와 기독교를 믿는 남부 지역(요루바족ㆍ이그보족)의 갈등이 폭발했거든요. 이후 내전과 쿠데타가 지겹도록 반복됐죠.

브루스 윌리스와 모니카 벨루치가 열연한 할리우드 영화 '태양의 눈물'. 나이지리아 내전이 배경이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니카 벨루치가 열연한 할리우드 영화 '태양의 눈물'. 나이지리아 내전이 배경이다.

1999년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종교 문제가 쉽게 해결될 리 있나요. 여기에, 가난하고 낙후된 북부지역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남부에 박탈감을 느끼며 분쟁은 계속됐습니다. 특히 북부와 남부가 충돌하는 중부지역에선 툭하면 사고가 터지죠. 지난달에도 유목민인 무슬림과 농민인 기독교인들이 종교와 토지 문제로 부딪쳐 수십 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2001년 나이지리아를 순수 이슬람국가로 만들겠다는 무장단체가 북부지역에서 탄생했는데 이들이 벌이는 테러ㆍ납치의 수준이 악명높은 이슬람국가(IS)를 넘어섰거든요. ‘보코하람’이 그 주인공으로, 특히 2014년 여학생 276명을 납치해 전 세계를 경악게 한 사건으로 유명하죠. 2009년 이후 보코하람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만 1만명이 넘고 150만 명이 피난한 것으로 집계됐을 정도입니다.

보코하람이 소녀들을 납치했을 당시, 칸영화제에서 '소녀들을 돌려달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선 스타들의 모습. 실베스터 스탤론, 멜 깁슨, 해리슨 포드, 셀마 헤이엑 등이 이 캠페인에 함께 했다.

보코하람이 소녀들을 납치했을 당시, 칸영화제에서 '소녀들을 돌려달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선 스타들의 모습. 실베스터 스탤론, 멜 깁슨, 해리슨 포드, 셀마 헤이엑 등이 이 캠페인에 함께 했다.

이런 상황을 바꿔야 하는 정부는 부정부패로 썩어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곤란한 건 평범한 주민들, 특히 여성입니다. 다국적 정보기업 톰슨 로이터가 최근 유엔 회원국 193개국을 대상으로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 10곳’을 조사한 결과, 나이지리아가 인도ㆍ파키스탄ㆍ사우디 등과 함께 꼽혔죠.

특히 위험한 건 납치인데요. 그 수준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토착 신앙을 이용해 ‘성매매를 하지 않으면 가족이 저주받는다’고 꼬여내고, 아예 10대 소녀들을 가둬놓고 강제로 출산하게 하는 일 등이 벌어지죠. 나이지리아 영화에 유독 ‘납치’라는 소재가 자주 다뤄지는 이유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잔뜩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곤란합니다. 풍부한 자원만큼이나, 잘살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정도 가득하기 때문이죠.

영화 '웨딩 파티 사수 작전'. 국내에서는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다.

영화 '웨딩 파티 사수 작전'. 국내에서는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다.

‘아프리카 부자는 나이지리아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은 장사 수완 좋기로 유명합니다. 전 세계 흑인 중에 가장 재산이 많은 알리코 단고테(약 141억 달러), 2위 마이크 아데누가(약 53억 달러)가 모두 나이지리아인이죠.

몇몇 부자들 얘기라고요? 이 나라 사람들의 열정이 가장 뜨겁게 빛나는 곳, 영화계 얘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나이지리아에선 한 해 2000편 넘는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할리우드와 발리우드(인도)를 뛰어넘어, ‘날리우드’(할리우드에 빗대 만든 말)란 별칭이 붙었을 정도죠.

재미있는 것은 영화 산업이 발전한 이유가 바로, 불안한 치안 때문이었단 겁니다. 밤늦게 나가 놀긴 불안했던 주민들에게 집에서 TV로 보는 영화는 유일한 낙이었거든요.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공급도 늘어났습니다. 1980년대부터 서서히 성장한 영화 산업은 어느새 100만 명을 먹여 살리는 거대한 효자 산업이 됐죠.

영화 '웨딩 파티 사수 작전'의 한 장면.

영화 '웨딩 파티 사수 작전'의 한 장면.

이 가능성을 눈여겨본 넷플릭스(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가 꽤 다양한 나이지리아 영화를 제공하고 있을 정도로 안팎의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날리우드 영화에는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나이지리아인의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백인이 거의 없고 이 나라 고유의 흥겨운 음악과 춤을 볼 수 있단 점도 특별한 매력이죠. 이 모든 것이,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꿈꾸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라 생각하면 어쩐지 뭉클해집니다.

참, 영화 속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영화 ‘웨딩 파티 사수 작전’만 봐도 그래요. 결혼을 앞두고 초조해하는 신부, 요란한 총각파티, 양가의 기 싸움, 떠들썩한 피로연을 보다 보면 저 먼 대륙의 사람들에게 묘한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신부가 오지랖 넓은 엄마에 대해 불평할 때는 특히 큰 웃음이 터집니다.
“나이지리아에선 결혼식이 완전 부모님 행사라니까!”
이거 왠지, 주변에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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