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끄고 출입 막고 … 숨죽인 크로키 끝난 뒤엔 박수

중앙선데이

입력 2018.07.14 01:55

업데이트 2018.07.16 10:39

지면보기

592호 05면

[SPECIAL REPORT] 일일 그림교실 가보니 
지난달 27일 서울 서교동 우리만화연대 스튜디오에서 열린 누드크로키 교실. 누드모델 최모씨가 무대 위에 자리를 잡자 4B연필 등을 든 수강생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김경빈 기자]

지난달 27일 서울 서교동 우리만화연대 스튜디오에서 열린 누드크로키 교실. 누드모델 최모씨가 무대 위에 자리를 잡자 4B연필 등을 든 수강생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김경빈 기자]

“휴대전화 전원 꺼 주세요. 시작합니다.”

매뉴얼 지키는 우리만화연대
일반인 대상 국내 첫 강좌 20년째
성평등·예술인 권익보호 특강도

조교의 말에 스무 명 남짓한 수강생은 일제히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조교가 출입문을 잠그자 실기실 가운데 무대에 선 남성 모델 최모씨가 타이머 세팅을 끝냈다. 최씨가 가운을 벗고 포즈를 취하자 4B연필 등을 쥔 수강생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최씨가 스스로 준비한 배경 음악에 맞춰 1분 알람이 울릴 때마다 바뀌는 동작의 연속은 한 편의 무언극이었다.

수강생들의 시선도 최씨의 손끝부터 발끝까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지막 알람이 울리자 수강생들 사이에선 박수가 터졌다. 최씨가 탈의실로 사라진 뒤 조교는 “마치겠습니다”며 자물쇠를 풀었고 그제야 수강생들은 하나둘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며 실기실을 빠져나갔다.

중앙SUNDAY 기자가 참여한 지난달 27일 서울 서교동에 있는 우리만화연대(우만연)의 ‘1일 누드크로키’ 현장에선 모델의 생동감과 수강생들의 긴장감, 음악의 은은함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우만연은 1992년 기계적 만화 제작 시스템을 극복하고 한국 만화 육성을 위한 대안을 찾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출범한 문화운동단체다. 99년 국내 최초로 대중을 상대로 한 누드크로키 강좌를 열기 시작해 올해로 20년째다. 우만연 스튜디오에선 요즘도 거의 매일 누드크로키 강좌가 열린다.

황경택 우리만화연대 이사

황경택 우리만화연대 이사

스튜디오의 출입문에는 “수업 중에는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강좌 신청 시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수업 중 정숙 ▶휴대전화 사용 금지 ▶수업 진행 중 출입 금지 등의 주의사항을 제시한다. 진행 전 조교는 매뉴얼에 따라 같은 주의사항을 말로 설명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출입문을 지킨다. ‘1일 누드크로키’에 처음 참여한 기자도 머릿속에 금세 각인될 정도였다. 황경택(46·사진) 우만연 이사는 “매뉴얼과 수업 진행 노하우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모델들과 끊임없이 소통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대중 상대 누드크로키 교실은 왜 열기 시작했나.
“만화는 인체 동작 표현이 어느 분야보다 중요한 장르다. 3시간 정도 작업하면 10만원 이상 드는 모델료에 부담을 느끼는 작가들의 현실적 곤란을 모여서 해결해 보자는 취지였다.”
수업 관리에 특별히 신경 쓰는 점은.
“디지털 기기는 책상 위에 못 올리게 하고 셀카도 금지다. 간혹 ‘이렇게까지 해야 되느냐’고 묻는 수강생에겐 개별적으로 위험성을 설득한다. 우리 매뉴얼은 아주 상식적인 수준이다. 조교가 상시 참여하고 반복적으로 주의사항을 전달한다는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다.”
일반인 수강생도 많다. 누드모델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개선됐다고 보나.
“나도 20대 중반엔 선입견이 많았다. 누드모델은 일반인에 비해 성적으로 매우 개방적일 거라고 여긴 게 대표적인 오해다. 그리면서 깨달았다. ‘프로구나, 직업인이구나’라고. 그려 본 사람은 많이 변했을 거라고 본다. 최소한 20년간 지나간 수천 명의 수강생은 모델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을 것 같다.”
우만연 스튜디오의 출입문에 붙은 경고성 안내문. [김경빈 기자]

우만연 스튜디오의 출입문에 붙은 경고성 안내문. [김경빈 기자]

모델들을 인격적·성적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경 써 온 우만연도 최근 상처를 입었다. 지난 2월 회원인 유명 시사만화가 박재동(66) 화백의 성희롱 문제가 제기되면서다. 박 화백은 곧 탈퇴했고 우만연은 이 사건과 미투 운동을 변화의 계기로 삼았다. 지난 5월엔 젠더교육 전문가 등을 초청해 성폭력 예방 교육이 포함된 ‘예술인을 위한 권익보호 특강’도 개최했다. 황 이사는 “미술계 전반의 젠더 감수성이 높아져야 작가뿐만 아니라 모델도 활동 중 성적 피해를 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획한 사업이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정권·임장혁 기자, 안희재 인턴 기자 deepe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