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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접고 레고 사업 … 즐겁게 밤 새우는 ‘성공한 덕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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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15면

11일 부천 하비앤토이 작업장에서 김성완 대표가 환풍 설비를 소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레고 브릭을 접착제로 고정하기 때문에 환기가 잘 되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 놓인 작품은 하비앤토이가 제작한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신인섭 기자]

11일 부천 하비앤토이 작업장에서 김성완 대표가 환풍 설비를 소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레고 브릭을 접착제로 고정하기 때문에 환기가 잘 되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 놓인 작품은 하비앤토이가 제작한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신인섭 기자]

가로 31.8㎜, 세로 15.8㎜, 높이 9.6㎜. 두 줄로 나란히 난 8개의 구멍.

김성완 하비앤토이 대표 #한국인 첫 레고 공인 프로 작가 #전 세계 16명뿐인 ‘꿈의 자격증’ #동호회 운영하다 창업 ‘덕업일치’ #“좋아하는 일 하니 아이디어 생겨”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레고의 기본 브릭(brick)이다. 김성완(44) 하비앤토이 대표는 이 작은 조각을 모아 그만의 세상을 쌓는다. 서울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알록달록한 제주 돌하르방, 제주도의 일상이 그의 손에서 탄생한다. 김 대표의 취미는 레고, 업(業)도 레고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성공한 덕후’다. 소수만 누릴 수 있다는 ‘덕업일치’의 행운을 이룬 김 대표에게 최근 훈장이 하나 더해졌다. 레고 공인 작가(LCP)로 최종 등록된 것이다. 세계에서 단 16명, 예비후보 4명까지 20명만 쓸 수 있는 직함이다. 한국인으로는 김 대표가 처음이다. 올해 LCP 후보 프로그램에 건축설계사인 이재원(38)씨가 등록됐다. 덕후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마니아를 뜻하는 ‘오타쿠’에서 파생된 말이다. 철도 마니아를 철덕후, 밀리터리 마니아를 밀덕후 등으로 부른다. 이에 따르면 김 대표는 ‘진성 레고덕후’인 셈이다.

LCP는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타이틀이지만 레고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꿈의 자격증’으로 통한다. 덴마크 레고 본사의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설계할 때 쓰는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전시회와 회사 홍보에 레고 로고도 붙인다. 본사에 김 대표의 활동을 지원하는 담당 직원이 생겼고, 매년 열리는 LCP 서밋에 초청되는 등 다양한 특전이 주어진다. 가슴에서 레고 조각이 쏟아지는 노란 남자로 유명한 미국의 네이선 샤와야도 LCP다. 사야와는 지난해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어 큰 화제를 모았다. 11일 부천 하비앤토이에서 만난 김 대표는 “신청 4년 만에 정식 LCP가 돼 진짜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전산학과 졸업 공학도

김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때 친구 집에서 물 건너온 레고를 처음 만났다. 그는 “로봇 프라모델은 한 번 만들면 끝이지만 레고는 다시 분해해 무궁무진한 것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레고에 홀렸지만 학교 앞 문방구를 뒤져도 구할 수가 없었다. 이후 입시와 대학을 거치면서 레고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재회는 2000년 대전에서 이뤄졌다. 카이스트 재학 중 대전에 롯데 백화점이 들어선다고 해 구경 갔다 장난감 코너에서 어릴 때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레고를 찾아냈다. 일반 브릭과 함께 전자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테크닉컬 레고 제품은 공학도의 피를 끓게 했다.

레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지만 당시 정보가 거의 없었다. 해외 인터넷 사이트와 이베이를 뒤지면서 정보를 모았다. 전공(전산학과)을 살려 직접 홈페이지도 개설했다. 국내 최대 레고 동호회(회원수 1만 명)인 브릭인사이드는 이렇게 탄생했다. 박사 과정 중이던 2004년 삼성전자에 펌웨어 엔지니어로 입사했지만 적응하기 어려웠다. 김 대표는 “야근이 당연한 긴 근무시간 등 조직 분위기와 맞지 않아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2년을 채우고 미련 없이 학교로 돌아갔다. 이후 여러 직장을 거치면서도 손에서 레고를 놓지 않았다. 레고는 그만의 오아시스였다.

사실 김 대표가 2008년 하비앤토이를 차린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마트와 롯데마트 간 완구 전문점 개점 경쟁이 붙어 전시용 대형 레고 작품을 만들 일이 많았다. 하지만 제작 가능한 업체는 손에 꼽았다. 브릭인사이드로 의뢰가 들어오는 작품을 재미삼아 제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창업으로 이어졌다. 김 대표는 “작정하고 회사를 그만둔 것도 아니었고 꾸준히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회사가 만들어졌고 직원이 모였고 창작가의 길을 가게 됐다”고 말했다.

답답한 조직문화 적응 못해 퇴사

취미가 직업이 되니 인생의 많은 고민이 사라졌다. 그중에서 억지로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가장 크다. 회사 운영의 걱정이 있지만 대신 출근이 즐겁다. 마구 일을 벌여도 되고 기꺼이 밤을 지새운다. 김 대표는 “학교나 회사에서는 늘 ‘나는 아이디어가 없구나, 공부 머리가 없구나, 창의력이 없구나’ 이렇게 믿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니 전혀 아니더라”고 말했다.

LCP가 되면서 회사도 제2의 창업이라 할 만한 변화를 겪고 있다. 군포의 좁은 사무실에서 벗어나 부천에 새 사무실도 얻었다. 264㎡(80평)에 달하는 작업장엔 5000여 종의 레고 브릭으로 가득하다. 김 대표는 “앞으로는 레고 모형 제작 납품보다 전시에 집중하겠다”며 “올해 중 인간과 반려동물의 교감을 주제로 한 레고 작품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의 시그니처 작품인 돌하르방이다. [신인섭 기자]

김 대표의 시그니처 작품인 돌하르방이다. [신인섭 기자]

김 대표는 한국적 작업 스타일을 많이 선보인다. 일상에서 친숙한 소재, 건축물을 축소한 디오라마 시리즈로 인정받고 있다. 해외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그의 돌하르방이 널리 알려져 있다. 레고 제작도 스타일이 다양하다. 1호 LCP인 미국의 션 케니의 경우 꿀을 빠는 벌새 같은 곤충을 소재로 한 자연 조형물 시리즈로 유명하다. 네이선 샤와야는 레고를 재료로 삼는 현대 미술 작가에 좀 더 가깝다는 평가다.

레고가 김 대표와 같은 LCP, 성인 레고 매니아의 커뮤니티인 ‘레고 엠바서더’ 등에 투자하는 것은 이들이 레고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2000년 초 레고는 사업 다각화에 실패하면서 휘청이다 마니아들 덕에 부흥한 경험이 있다. 아마추어 레고 창작가를 디자이너로 대거 채용하자 창조적 파괴가 따라왔다. 2008년 1조6000억원이었던 레고의 세계 매출액은 지난해 기준 6조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중국산 복제품의 범람으로 성장세가 꺾이면서 지난해 직원 1400명을 감원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 대표를 비롯한 레고 덕후들이 다시 한번 도약의 발판이 돼 줄 것이지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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