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B연필로 슥슥 희열 느꼈다, 누드모델 눈물도 모른 채

중앙선데이

입력 2018.07.14 00:02

업데이트 2018.07.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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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02면

[SPECIAL REPORT] 나는 그린다
누드크로키, 3분, 종이에 콘테, 297X430mm.

누드크로키, 3분, 종이에 콘테, 297X430mm.

#모델 A에 관한 기억

크로키 10년째 현직 기자의 고백
“누워 있는 포즈 때 몸 위로 건너”
“애인 있어? 다짜고짜 반말 끔찍”
“불결한 실기실 탓 몸 아프기도”

홍대 남자모델 사진 유출 사건 뒤
흘려듣던 그들의 아우성 떠올라
삶의 활력소 얻었지만 가슴 뜨끔

“인권 무시한 예술은 폭력일 뿐”
전남대 누드모델의 절규 귓가에
부조리한 그늘 이젠 걷어야 할 때

“선생님, 저도 그림공부 시작했어요.”

지난 4월 모델 A(25)는 휴식시간에 휴대전화에 저장된 습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 줬다. 전문가 솜씨는 아니었지만 노력과 애착이 묻어 있는 거리 풍경들이었다. 휴대용 팔레트가 없다기에 빌려줬더니 “ 다음에 올 때 돌려 드릴게요”라며 웃던 A의 표정이 생생하다.

A를 다시 만난 건 며칠 뒤 TV 화면을 통해서였다. 후드티와 모자에 파묻힌 얼굴이었지만 안경알 너머 눈매만으로도 A임을 확인하는 데 충분했다. A는 ‘홍대 누드크로키 몰카 사건’의 피의자가 돼 있었다. 촬영·유출의 범인이 학생일 거라는 추측을 뒤집는 반전에 사건 발생 11일 만의 전광석화 같은 구속이 이어지면서 빚어진 논란은 연일 TV와 인터넷을 달궜다. ‘불법행위’는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쇳덩어리가 들어앉은 듯 무거워졌다.

신문사 편집인포그래픽 기자로 4B연필과 붓 대신 마우스를 잡은 지 26년이 지났다. 10년 전부터 매 주말 누드크로키를 그린다. 유독 마감에 피 말렸던 어느날, 무심코 집어 든 연필로 뭔가 끄적이다 흑연이 종이 표면에 ‘슥삭슥삭’ 그어질 때 손끝에 와닿는 미세한 마찰의 느낌이 계기였다. 컴퓨터에 빼앗겼던 아날로그 감성이 튀어나왔고 곧바로 ‘미술학원’ 등을 검색하다 ‘누드크로키교실’을 발견했다. 준비는 종이와 4B연필이면 충분했다. 1분 또는 3분 내에 모델의 몸짓에 맞춰 춤추듯 연필을 놀려야 하는 누드크로키는 어느새 삶의 활력소가 돼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이곳저곳의 누드크로키교실을 전전했지만 지금은 개인작업실을 얻어 주말마다 누드크로키교실을 운영하는 ‘경지’에 올랐다. 블로그를 만들고 누드크로키교실을 홍보하자 수도권 곳곳에서 그림에 한 맺힌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홍대 사건 이후 주말 누드크로키교실을 맞는 마음은 지난 10년 동안의 주말처럼 설레지만은 않다. 내가 느꼈던 충만함도 어떤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무너진 불문율

개인 화구 상자를 모아 만든 더블 베드 크기의 무대 위에서 가운을 풀어헤친 채비스듬히 누워 있는 남성 누드모델의 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 ‘가짜 뉴스’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쉬는 시간에 성기를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누드모델들에겐 불문율이다. 수업 중이거나 휴식 시간이라도 교수·학생·모델 누구도 사전 동의 없이 모델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다. 원칙적으로 작업 현장과 휴게 공간은 분리돼야 하고 남녀 모델이 따로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여건이 안 된다면 함께 쉴 수 있도록 모델들이 서로 배려하는 게 기본 에티켓이다.

지난 5월 1일 홍익대 미대 군상(群像) 크로키 수업 현장에서는 그 모든 불문율이 무너져 내렸다. 현장에 모델들이 쉴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사용도 제한되지 않았다. 작업 및 휴게 공간에 대한 출입통제도 이뤄지지 않았다. 남자 모델은 쉴 곳을 독점했고 가운을 풀어헤쳤다. 쉴 곳을 잃은 A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누드모델들의 ‘아프다’는 신호

충격이 잦아든 자리엔 죄책감이 밀려왔다. 지난 10년간 조우했던 모델들이 보내왔던 신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저 애환 정도로만 흘려들었던 말들이 살아나 양심에 꽂혔다. 사고는 예견됐고 5월 1일 홍익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드크로키 작업은 미술의 기초이자 미술 교육의 필수 과정임에도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현장을 이미 모델들은 내게 고발했다.

“간이 탈의실도 커튼으로 대강 가려져 있어 누군가 갑자기 젖히고 들어올까봐 늘 불안해요.”(모델 B·26·여성)

“누워 있는 포즈 취할 때 제 몸 위로 넘어가는 학생들이 있어요. 정말 ‘노답’이죠.”(모델 C·23·여성)

“포즈를 취하는데 카메라 셔터 소리에 깜짝 놀랐어요. 다행히 자기 그림을 찍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셔터 소리만 들어도 머리털이 곤두서요.”(모델 D·25·여성)

“다짜고짜 반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몇 살이야? 애인 있어? 수업 끝나고 뭐 해? 이런 식이죠.”(모델 E·22·여성)

성희롱과 성폭력은 모델에게 상존하는 위협이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성기가 노출되는 포즈를 원할 때 난감한데요. 느껴져요. 이 사람이 정말 이 포즈가 필요한지 아니면 그냥 변태인지.”(모델 F·22·여성)

“개인 작업실에 갔는데 봉투에 돈을 더 넣어 주더니 ‘남자가 주는 돈은 다 이유가 있는 거야’라면서 양다리를 쫙 벌리는 포즈를 요구했어요. ”(모델 G·23·여성)

인격권만큼이나 심각하게 위협받는 것은 건강권이다. ‘실기실이 너무 더럽다’는 것은 학생들도 인정하는 일반적 현실이지만 어떤 대학이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소식을 들어 보지 못했다. 가끔 ‘깨끗한’ 백화점 문화센터 일을 맡게 되는 건 모델들에겐 행운으로 여겨진다.

“젊은 나이에 골반이 뒤틀리거나 관절염을 얻은 모델이 많아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아크로바틱한 포즈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곳이 적지 않아요.”(모델H·36·남성)

“실기실 위생은 늘 불만이죠. 여자 모델은 바닥에 앉으면 바로 중요 부위가 닿기때문에 늘 세균에 노출될 위험이 있어요. 이 때문에 자궁 쪽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다니는 모델도 있지요.”(모델 I·29·여성)

“ 목탄가루 날리는 회화과 실습실, 찰흙 먼지 가득한 조소과 실습실에서 몇주간 고정 포즈를 하다 보면 기관지가 많이 아파요. 수업 전에 환기해 두는 경우가 별로 없죠.”(모델 J·33·여성)

나는 노동자로도 예술인으로도 인정 받지 못한 채 ‘정물’로 취급되던 누드모델들의 신호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화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탈의실을 만드는 등 내 앞가림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복과 저항 사이

홍대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식기도 전인 지난 5월 말 전남대에는 누드모델 K의 대자보가 붙었다. 이 글은 페이스북 페이지 ‘전남대학교 대나무숲’을 타고 널리 퍼졌다. 대학원 강의 중 한 여성 만학도가 동영상을 촬영하고 포즈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신체 접촉을 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예술에 한 발짝 더 다가가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일을 하며 보람 된 순간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우리를 피사체로만 보는 시선은 견디기 힘듭니다. 일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가 인간임을, 여러분들이 존중해야만 하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모든 화가분이 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예술은 폭력일 뿐입니다.”(K의 대자보에서 발췌)

결국 가해자는 K를 찾아 사과했고 예술대학장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학교 측은 뒤늦게나마 누드모델 수업과 관련된 가이드라인과 학과별 특성에 따른 윤리 교육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K는 A와 달랐다. A는 법의 테두리를 넘은 보복을 택했지만 K는 공개적 주장으로 자신을 지켰다. K의 항의의 의미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에 그치지 않았다. 저항 뒤에 도사린 생계 곤란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소한의 상호 존중과 배려가 무너진 미술계의 권력과 관성에 맞섰다. K의 작은 목소리는 더 커져야한다. 누드모델들의 ‘아프다’는 신호를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

◆누드크로키
누드(Nude)와 크로키(Croquis)의 합성어. 벗은 인체의 모습을 짧은 시간에 특징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표현하는 스케치와 유사한 기법.

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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