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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에 미움받으며 33년간 자리 지킨 2인자 정성왕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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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27)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에 위치한 홍릉.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홀로 잠들어 있다. [사진 김순근]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에 위치한 홍릉.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홀로 잠들어 있다. [사진 김순근]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에는 조선 왕릉 42기 중 유일하게 왕의 유택이 비어 있고 왕비만 잠들어 있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다.

정성왕후가 홀로 잠들어 있는 홍릉에 새삼 관심이 가는 것은 최근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 때문이다. 흔히 김 전 총리를 영원한 2인자라 말한다.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2인자로서의 처신이 읽힌다. 이런 ‘2인자’의 처신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정성왕후다. 특히 자신이 처한 주변의 특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분야의 1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난 성격의 영조에 미움받으며 33년간 자리 지켜

정성왕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다 자식까지 없음에도 조선시대 왕비 중 가장 긴 33년간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 탕평책으로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치열한 당쟁, 영조와 사도세자의 반목 등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더구나 의심 많고 특이한 성격의 영조 눈 밖에 나 내쳐지지 않고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는 건 2인자로서의 완벽한 처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영조는 정성왕후가 66세로 세상을 떠나자 홍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도 묻히겠다며 옆에 유택을 지었다. 그러나 막상 영조는 홍릉이 아닌 동구릉에 51세 연하의 계비인 정순왕후와 나란히 잠들어있다.

정성황후의 홍릉에는 당초 영조가 묻히기로 한 유택이 비어있다. [사진 김순근]

정성황후의 홍릉에는 당초 영조가 묻히기로 한 유택이 비어있다. [사진 김순근]

정성왕후는 달성 부원군 서종제(서재필의 8대조)의 딸로 1704년 13세 되던 때 11세이던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훗날 영조)과 결혼했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아주 좋지 않았다. 영조는 정성왕후를 철저히 외면했다. 1724년 경종이 승하해 등극했지만 자신은 경의궁에 기거하고 왕비는 창덕궁에 내버려 둔 채 거의 찾지 않았다고 한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왕이 왕비의 처소인 대조전을 찾았다는 내용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정성왕후는 영조를 하늘같이 모시고 남편의 후궁들을 살갑게 대하며 사도세자 등 후궁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또, 무수리 출신인 시어머니 숙빈 최씨(영조의 친모)를 비롯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등 왕실 어른들을 잘 모신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영조는 정성왕후에 끝내 마음을 주지 않았다.

장희빈 대빈묘. [사진 김순근]

장희빈 대빈묘. [사진 김순근]

영조는 정성왕후가 죽은 뒤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는 행장에 정성왕후가 43년 동안의 왕궁 생활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고 윗전을 극진히 모시며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고 적었다.

자신을 대놓고 미워하는 남편에게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기란 웬만한 내공 없이는 어렵다. 정성왕후가 너그럽고 어진 성품을 가졌다고 하지만 남편의 심한 구박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은 것은 위태한 2인자의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한 극도로 절제된, 완벽한 처신일 수도 있다.

후궁과 그 자식들에게도 살갑게 대해

이처럼 속으로 삭이다 보니 건강이 좋을 리 없다. 50세를 넘기면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영조는 엄살 부린다는 식으로 핀잔만 줬다. 정성왕후는 아프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영조와 사도세자의 극심한 갈등 속에 친자식처럼 아꼈던 세자의 안위를 노심초사하다 세상을 떠난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환갑을 망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하들이 잔치를 열자고 하자 허락하지 않았고, 환갑을 사흘 앞두고는 후궁 문 씨의 처벌 문제로 대왕대비인 인원왕후와 대립하던중 갑자기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소동을 벌이며 궁 밖으로 나가버림으로써 결국 연회를 무산시켰다. 일반인이라면 이런 남편을 미소로 깍듯이 모시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정성왕후가 숨을 거두기 전 검은 피를 한 요강 토했다고 적고 “시어머니가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다 쏟아내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했다.

영화 '사도'에서 혜경궁 홍씨 역을 맡은 배우 문근영. [사진 다음영화]

영화 '사도'에서 혜경궁 홍씨 역을 맡은 배우 문근영. [사진 다음영화]

영조가 이처럼 정성왕후를 대놓고 미워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첫날밤 일화만 전해지고 있다. 즉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보며 "참 곱다"고 하자 정성왕후가 “고생을 해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 이 말에 영조는 무수리 출신으로 온갖 고생을 다 해 손이 거친 자신의 친모 숙빈 최씨를 모욕하는 것으로 알고 분노해 극도로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불과 11살의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심기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귀를 씻고 양치질을 하고,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심할 정도로 구분하는 등 『한중록』에 기록된 영조의 말과 행동에 대해 현대 의학에서는 편집증 증세와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영조의 눈 밖에 난 사도세자는 영조의 이런 괴팍한 성격의 대표적 희생자인 셈이다.

이런 영조를 상대로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하며 최장수 왕비 자리를 보존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혹자는 홍릉에 홀로 잠든 정성왕후가 외롭다며 측은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성왕후는 어찌 보면 죽어서야 1인자의 그늘에서 영원히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조가 숨을 거두자 손자인 정조는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영조의 능을 동구릉에 원릉을 조성했고 훗날 51세 연하의 계비인 정순왕후도 여기에 묻혔다.

고양시 홍릉에 따로 묻혀…죽어서야 '해방'

서오릉은 숲이 울창해 산책하기에 좋다. [사진 김순근]

서오릉은 숲이 울창해 산책하기에 좋다. [사진 김순근]

그런데 그곳은 제17대 효종이 묻혔다가 능에 금이 가는 등 문제가 있어 파묘된 자리다. 정조는 103년간 비어 있던 이 파묫자리를 영조의 능으로 만듦으로써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하고, 사도세자와 자신을 친자식, 친손자처럼 대해준 정성왕후를 영조로부터 영원히 해방해주어 은혜를 갚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릉이 있는 서오릉은 세조의 장남으로 20세에 요절한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을 비롯해 창릉(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능), 익릉(제19대왕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능), 명릉(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 등 모두 5개의 능이 있고 1970년대에 장희빈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숙종과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장희빈은 정성왕후의 시부모들이어서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5명의 시부모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서오릉은 1.32km의 서어나무 숲길, 1.08km의 소나무 숲길, 2.14km 단풍나무 숲길 등 울창한 숲속에 총 4.54km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사색에 잠기며 걷기에 좋다.

1인자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장수하는 2인자의 행동은 어쩌면 현대인이 참고할 출세를 위한 처신술일 수 있다. 물론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배운다면. 서오릉 울창한 숲길을 거닐며 2인자로서 완벽하지만 기구한 삶을 살다간 정성왕후를 떠올리며 역사 산책을 해보자.

김순근 여행작가 sk4340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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