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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인 식탁에 오를 뻔한 셰리와인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인호의 알면 약 모르면 술(11)

스페인 바르셀로나 광고대행사 DDB의 Vina Monty Osborne 와인 광고. [사진 원본 출처 adeevee.com]

스페인 바르셀로나 광고대행사 DDB의 Vina Monty Osborne 와인 광고. [사진 원본 출처 adeevee.com]

여행이 잦은 휴가철이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장거리 이동이 편해지다 보니 과거처럼 여행에 많은 준비물이 필요한 시대는 아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집 밥이 그리워질 것에 대비해 컵라면이나 김치 등을 챙기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행지에서 현지 음식과 술을 마시는 것을 여행하는 즐거움의 하나로 여긴다. 식도락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지나 험지를 간다거나 아주 오랜 기간 이동이 필요한 경우 여전히 준비물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세면도구나 옷 등의 필수 여행 준비물 외에 휴대용 먹거리와 여정의 노고를 잊게 해 줄 술 몇 병을 함께 챙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와인을 좋아하는 성인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장거리 여행에 알맞은 술은 어떤 것이 있을까?

오래전 나사(NASA, 미국 항공 우주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1970년대 초반 나사는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여행을 보다 안락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주요 과제 중 하나가 우주선에서의 음식 수준을 향상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행사들은 분말을 뭉쳐 사각형으로 만든 건조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시된 해결 방안에 냉동식품과 습식성 음식의 밀봉 포장이 포함됐다. 스파게티나 스테이크 등이 비행사의 식단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행의 고단함을 덜어주거나 축하나 기념의 순간에 마실 소량의 술도 고려 대상이었다. 문제는 어떤 술이 가장 적합할까였다.

긴 항해와 더운 날씨를 견디는 셰리 와인

찰리 볼랜드가 30년간 나사에서의 경험을 담아 출간한 책인 '우주비행사의 요리책(The Astronaut's Cookbook: Tales, Recipes, and More)'엔 자신이 우주선의 기내 와인으로 셰리를 선정했던 과정과 이유가 적혀있다. [사진 원본 출처 amazon.com]

찰리 볼랜드가 30년간 나사에서의 경험을 담아 출간한 책인 '우주비행사의 요리책(The Astronaut's Cookbook: Tales, Recipes, and More)'엔 자신이 우주선의 기내 와인으로 셰리를 선정했던 과정과 이유가 적혀있다. [사진 원본 출처 amazon.com]

우주 비행 시 사용될 와인의 선정은 나사의 우주 항공식 연구 책임자인 찰리 볼랜드(Charles Bourland)가 맡았다. 그는 와인 양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UC 데이비스 대학 연구원들과 수차례 협의한 끝에 최종 선택했다. 낙점받은 와인은 바로 셰리(sherry) 와인이었다.

이유는 이러했다. 비행선에 무겁고 위험한 병을 실을 수가 없어 빨대가 부착된 플라스틱 팩에 와인을 담아야 해 재포장 후에도 향과 맛을 잃지 않는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이 점에서 셰리 와인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실 셰리 와인의 유래나 역사를 대충이라도 살펴본다면 나사의 위 선택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스페인의 최남단 안달루시아 지역의 헤레스(Jeres)는 수천년간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헤레스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 셰리다. 곧 셰리란 헤레스에서 나는 와인이란 뜻이다.

번성했던 무역항답게 이곳의 와인은 긴 시간의 항해와 더운 날씨에 견디도록 만들어지고 변형됐다. 방법은 발효가 끝난 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해 오크통에서 특별한 숙성을 거치게 하는 것이다. 즉 셰리는 오랜 여행을 위해 탄생한 와인이란 얘기다.

음주 비행 여론에 셰리 와인 프로젝트 없던 일로

셰리는 숙성 방식과 이에 따른 향과 맛의 차이로 피노, 올로로소, 아몬티야도, 만자니아 등 여러 스타일로 나누어진다. 입맛을 돋구거나 정리해주는 식전주, 식후주로 알맞으며 타파스 요리등을 내는 스페인 음식점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다. 왼쪽은 피노(Fino) 셰리, 오른쪽은 아몬티야도. [사진 조인호]

셰리는 숙성 방식과 이에 따른 향과 맛의 차이로 피노, 올로로소, 아몬티야도, 만자니아 등 여러 스타일로 나누어진다. 입맛을 돋구거나 정리해주는 식전주, 식후주로 알맞으며 타파스 요리등을 내는 스페인 음식점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다. 왼쪽은 피노(Fino) 셰리, 오른쪽은 아몬티야도. [사진 조인호]

이와 같은 나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음주 비행(?) 아니냐는 대중의 비난 여론에 나사의 셰리 와인 프로젝트는 마지막 단계에서 전면 취소됐다. 하지만 다음에 발표된 연구자료들은 적어도 비행사의 건강과 관련해 나사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만 몸켄(Iman Momken) 박사팀이 미국 실험생물학회 연합 저널(journal of the Federation of American Societies for Experimental Biology)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생쥐의 뒷다리를 잡고 거꾸로 매달면 골밀도가 감소하고 인슐린 저항성이 줄어든다. 이는 인체가 우주 공간에서 오랜 시간 무중력 상태로 있을 때와 유사한 결과다. 이때 와인의 항산화 성분인 레스베라트롤을 투여한 그룹의 생쥐들에서는 이러한 부정적 증상들이 개선된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비단 우주 비행사뿐 아니라, 땅 위에서 육체 활동이 현저히 제한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사고나 질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물론이고 오랜 시간 책상이나 의자에 앉아 일해야 하는 사무직에도 해당한다는 얘기다. 우주여행용 와인으로 쓰이려 했던 셰리 와인은 우리가 아는 일반 와인과 다소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발효가 끝난 와인에 브랜디 등의 알코올을 추가로 넣는다.

둘째, 알코올을 넣은 와인을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데, 이때 와인을 덜 채워놓는다. 이렇게 하면 와인과 공기가 닿는 면에 효모가 쌓여 막을 이루게 된다. 이를 플로르(Flor)라고 한다. 와인은 통 안의 공기와 접촉하며 약한 산화가 진행되며, 효모 막이 더 이상의 급격한 산화를 막아준다.

플로르(Flor). 알코올을 넣은 와인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데 이때 와인을 덜 채워놓는다. 이렇게 하면 와인과 공기가 닿는 면에 효모가 쌓여 막을 이루게 된다. [사진 원본 출처 WIKIMEDIA COMMONS(El Pantera)]

플로르(Flor). 알코올을 넣은 와인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데 이때 와인을 덜 채워놓는다. 이렇게 하면 와인과 공기가 닿는 면에 효모가 쌓여 막을 이루게 된다. [사진 원본 출처 WIKIMEDIA COMMONS(El Pantera)]

셋째, 오래된 와인과 어린 와인을 섞어 만든다.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가 경험을 통해 깨닫는 철칙이다. 셰리 와인이 지닌 오랜 생명력 역시 마찬가지다. 특별한 과정을 더해 획득한 것이다. 우리 삶의 여정이 오래 가게 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물이 필요할까? 셰리 와인을 통해 이에 대한 힌트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발효 후 추가로 넣는 알코올처럼 인위적인 생명력을 불어넣기는 힘들겠지만, 통에 와인을 가득 채우지 않고 일부를 비워놓고 산화(즉, 노화)에 대한 면역을 키우는 것은 욕망을 덜어내고 시행착오를 통한 지혜와 결과를 소중히 여기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다.

다른 해에 수확한 포도의 숙성액을 섞는 것은 앞 세대의 경험을 귀하게 여기고 새로운 것을 포용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생각한다면 이의 비유가 지나친 것일까. 나 역시 더 오래 나 자신의 색과 향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볼 따름이다. 셰리 와인처럼 말이다.

조인호 약사·와인 파워블로거 inho34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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