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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경찰이 와도 의사에 폭언·발길질” 응급실 폭행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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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1일 전북 익산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술에 취한 40대 남성이 손가락 골절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의사를 폭행하고 있다. 그는 의사가 웃음을 보였다는 이유로 ’내가 웃기냐“며 주먹을 휘둘렀다. 청원경찰이 출동한 뒤에도 욕설을 하면서(오른쪽 사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지난 1일 전북 익산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술에 취한 40대 남성이 손가락 골절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의사를 폭행하고 있다. 그는 의사가 웃음을 보였다는 이유로 ’내가 웃기냐“며 주먹을 휘둘렀다. 청원경찰이 출동한 뒤에도 욕설을 하면서(오른쪽 사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지난 5일 오후 전북 익산의 한 병원 응급실. 출입문 옆에는 ‘의료인에게 폭행이나 폭언할 경우 5년 이하 징역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취재를 위해 응급실에 들어가려 하자 병원 직원이 “보호자 한 명 말고는 입장할 수 없다”며 막았다.

익산 사건 피해의사 당시 상황 증언 #가해자 한때 석방 … “보복 두려웠다” #5년형 중범죄지만 대부분 벌금형 #“버스기사 폭행처럼 엄격 처벌해야”

지난 1일 이 응급실에서 술에 취한 40대 남성이 의사를 폭행했고, 당시 폐쇄회로TV(CCTV) 화면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가해 남성은 병원 청원경찰이 출동해도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추가로 공개된 휴대전화 동영상에서 “xx놈아”라며 의사를 향해 의자를 걷어찼다. 피해 의사 A씨(37·응급의료센터장)가 지난 5일 중앙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4층 입원실에는 환자 이름 칸이 비어 있고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노크를 두 차례 하자 A씨가 문을 열었다. 그는 코뼈와 이가 부러졌다. 목이 삐고 뇌진탕 증세를 보인다.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도 있다. 그는 “지난 사건을 다시 기억하기가 힘들다. 인터뷰는 짧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날 그에게 정신과·치과 치료가 예정돼 있었다. 다음은 A씨와의 일문일답.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보건의료인 800여 명이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뉴스1]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보건의료인 800여 명이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뉴스1]

CCTV 영상을 보면 경찰 출동 후에도 가해자가 폭력을 행사하던데.
“CCTV에 나온 경찰은 병원에서 고용한 청원경찰이다. 청원경찰은 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제지할 권한이 없다. 경찰은 사건 발생 6~7분 뒤에 출동했다.” 
CCTV 영상 다음에도 폭력이 이어졌나.
“정신을 차려 보니까 코피가 나고 있었다. ‘왜 때렸나’고 묻자 환자가 욕설을 했다. 증거를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해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었다. 그러자 발로 한 번 더 찼고 손에서 전화가 떨어졌다. 맞은 상황이 기억나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경찰이 왔다.”
경찰이 바로 체포했나.
“경찰이 왔는데도 가해자는 ‘감방 갔다 와서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계속했다. 발차기를 하려고 해 그때서야 경찰이 밖으로 데려갔다.”
경찰의 조치에 문제가 또 있다고 보나.
“경찰이 다음날 가해자를 풀어줬다고 하더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경찰에게 ‘왜 풀어줬느냐’고 따졌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이어 ‘나한테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경찰이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A씨는 가해자의 재폭행을 걱정하는 차원을 넘어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대낮에 병실 문을 잠그고 있는 이유를 알 듯했다.

모욕감이 클 것 같다.
“사실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기 힘들다. 가해자가 계속 욕설을 하는데 경찰은 그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당할 줄 몰랐다. 복귀(진료)가 어렵지만 내가 빠지면 응급실 운영이 안 될 것 같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는 고심 끝에 응급실 복귀를 결정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A씨는 그 병원의 응급실 폭행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한 20대 남성이 난동을 부려 응급실이 1시간 가까이 마비됐다. A씨는 “응급실에 뇌경색 환자와 심근경색 환자가 있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응급의료관리법을 적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법으로 응급의료를 방해하거나 의료시설을 파괴한 사람에 대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적용이 쉽지 않다고 한다. 충남의 한 병원 응급실 의사 B씨는 병원 난동을 혼자서 해결하려다 특수폭행 혐의로 기소됐다. 올해 초 한 환자가 술에 취해 “입원해 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며 의사 대기 공간까지 들어왔다. 급히 캡사이신(고추에 든 매운맛 성분) 가스 스프레이를 발사했다. 이로 인해 특수폭행죄를 뒤집어썼다. B씨는 “검찰에서 정당방위로 보고 무죄 처리해 처벌을 면했다. 가해자의 욕설과 난동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처리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경찰 측은 “익산 응급실 폭행 사건은 7년 이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상해죄를 응급의료 관리법과 함께 적용했다”며 “응급실에서의 폭언과 난동은 회사나 상점과 같은 장소보다 더욱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익산 응급실 폭행 가해자가 이튿날 풀려난 것과 관련, “손가락 골절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가해자는 지난 5일 오후 응급의료법 위반 혐의와 상해죄로 구속됐다.

하지만 의료계의 두려움은 여전하다. 대한의사협회·대한응급의학회·대한간호협회 등 보건의료인 800여 명은 지난 8일 경찰청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의료인 폭행범 징역형 처벌, 응급실 무장 경찰관 배치를 요구했다.

의협에 따르면 최근 6년간 의료인 폭행과 관련된 사건은 대부분 벌금형에 그쳤다. 응급의료법을 적용해도 최고 형량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미국에서는 의료인 폭력은 2급 폭행죄로 분류한다. 최고 7년형을 받는 중범죄다. 호주의 퀸즐랜드주는 의사나 간호사, 구급대원을 폭행할 경우 최고 14년형을 받을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종합병원 응급실에 경찰 초소(Police Post)를 설치했다.

이강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대한외상학회장)는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치고 폭행 안 당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현행 처벌 조항이라도 제대로 지킬 필요가 있다”면서 “버스 운전자를 폭행하면 승객 안전을 고려해 가중처벌하는 것처럼 환자 안전을 책임지는 의사 폭행에도 법 집행이 엄격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손유동 보라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중소병원은 응급실에 경비 업체 직원을 두기도 어렵다. 응급 환자 관리료에서 주취자 진료에 따른 수가를 보상해 줘야 병원에서도 인력에 투자할 수 있다”면서 “경찰도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초기부터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산=김민상 기자, 정종훈·한영익 기자 kim.min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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