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래퍼 완벽 변신 박정민 “난 노력하는 데 천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변산’에서 박정민이 부른 랩 가사는 그가 직접 썼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변산’에서 박정민이 부른 랩 가사는 그가 직접 썼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현장이 제일 재밌다는 걸 이 영화로 새삼 느꼈어요. 찍으면서 중압감으로 아주 힘들었는데, 이준익 감독님과 동료 배우들 덕에 버텼습니다.”

데뷔 7년 만에 ‘변산’서 단독 주연 #직접 랩 가사 쓰면서 1년여 비지땀 #전작 ‘그것만이…’에선 피아노 수련 #고대 자퇴 후 한예종서 연기 공부 #‘파수꾼’ ‘동주’로 강한 존재감 알려

4일 개봉한 랩 음악영화 ‘변산’으로 만난 박정민(31)의 말이다. 독립영화 ‘파수꾼’(감독 윤성현)으로 장편 데뷔한 지 7년 만의 첫 원톱 주연작. 래퍼로서 실패를 거듭하다 고향 변산에 돌아간 청년 학수의 성장을 담았다.

2년 전 영화 ‘동주’로 그를 발견한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선 10분의 1도 못 보여준 박정민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써먹으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지난 주말 극장가에선 흥행 3위에 그쳤지만 박정민에 대한 관객 반응은 뜨겁다. 이는 그가 학수의 속내를 담아 직접 작곡하고 부른 수준급의 극중 랩만 들어봐도 이해가 간다. 1년여에 걸친 노력의 결과다. 올해 초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감독 최성현)에서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피아노 천재 진태 역을 자폐 성향부터 피아노 실력까지 실제에 가깝게 소화해낸 데 이어서다.

“닮아 있지 아니 닮고 싶지도 않던 존재가 부재가/ 되며 남긴 말이 내 무제 인생의 부제 되네”. 극중 랩 ‘노을’의 가사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낙향한 무명 래퍼의 씁쓸함, 원망했던 아버지(장항선 분)에 대한 연민 등을 랩 플로우에 나지막이 녹여냈다. ‘변산’의 랩 프로듀싱을 맡은 래퍼 얀키는 그를 두고 “정말 괴물 같다. 캐치가 빠른 데다 감정까지 담을 줄 안다. 연습량까지 어마어마하다”며 “래퍼로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섰다”고 말했다.

이준익 감독이 애초 랩 음악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도 ‘동주’ 뒤풀이 때 박정민의 랩을 듣고서다. 정작 박정민 스스로는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며 “촬영 내내 매일 ‘가사 쓰고, 랩하고, 내일은 어떻게 연기하나’ 고민할 게 너무 많았다”고 털어놨다. ‘노력의 천재’. 그가 2년 전 출간한 산문집 『쓸 만한 인간』(상상출판)에서 자신을 지칭했던 말이다.

“중학교 때 CB 매스(힙합그룹)가 나오고부터 랩을 즐겨 들었어요.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랩은 시 같아요. ‘쇼미더머니’(TV 랩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래퍼가 살아온 이야기를 가사에 확 풀어놓는 걸 들으며 공감하고 많이 울기도 했죠. 영화에선 랩 스킬보단 학수의 진심을 담은 하나의 대사로 접근하려 했어요.”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고향에 다시 돌아온 학수는 상처받을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본심을 드러내지 못하는데 절제된 표정 연기가 랩만큼 절묘하다.

그는 “다들 감정을 어느 정도 숨기고 살지 않냐”며 “주변 캐릭터가 살아야 학수가 산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동료배우의 연기에 호흡을 맞추는 데 주력했다”고 돌이켰다.

주연으로 임한 현장이 달랐던 점은.
“모든 게 달랐다. 예전에 주연을 맡은 베테랑 선배님들이 현장 분위기를 노련하게 끌어주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주연을 맡으면 꼭 그렇게 해야지 했었다. 촬영 초반엔 의지가 넘쳤는데 내 연기와 랩만으로 버겁더라. 딴엔 티를 안 내려고 하는데 결국 과부하가 걸려서 안 울기로 했던 학수의 어머니 장례식 회상 장면에서 촬영 준비하는 동안 눈물이 빵 터졌다. 끝나고도 20분을 내내 울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중심을 되찾아갔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선 장애가 있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변신했다. [사진 CJ E&M]

‘그것만이 내 세상’에선 장애가 있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변신했다. [사진 CJ E&M]

‘그것만이 내 세상’ 때도 대역 없이 피아노 연주 장면을 찍기 위해 6개월간 매일 5시간씩 연습했던 그다. 완벽을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같다고 하자 “저란 놈은 그래야 남들 하는 것 정도 한다”고 했다. 고려대 인문학부를 자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시 입학한 것도 꿈꿔온 연기에 ‘제대로’ 뛰어들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매사에 치열해서, 사춘기가 혹독했을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다 사춘기였다. 키도 쪼그맣고 인기도 없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은 없었는데 반항심이 들끓었다. 엄마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속으론 하기 싫어 죽겠고. 그러면서도 성적 안 나올까 봐 불안해서 나를 몰아붙였다. 학생으로선 공부를 잘하는 게 임무니까. 배우로선 그게 연기고.”
독립운동가 역으로 주목받은 ‘동주’.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독립운동가 역으로 주목받은 ‘동주’.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학생 시절 찍은 첫 단편 ‘세상의 끝’(2007) 이후 TV·영화를 통틀어 출연작만 30편 남짓. 대표작으론 ‘파수꾼’과 ‘동주’를 꼽았다. ‘파수꾼’에서 그가 맡은 고교생 희준이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에게 싸늘하게 돌변하던 순간은 지금도 명연기로 회자된다. 이 영화에 반한 배우 황정민은 갓 데뷔한 박정민을 자신의 소속사로 이끌었다.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뜨겁게 연기한 ‘동주’는 흥행과 함께 대중에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지난해와 올해는 박정민에게 각별했다. 이준익 감독과 두 번째 만난 ‘변산’을 촬영한 데 이어 차기작 ‘사냥의 시간’(가제)에선 장편 데뷔작 ‘파수꾼’을 함께했던 윤성현 감독, 배우 이제훈과 다시 뭉쳤기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닥친 미래, 위험한 범죄를 계획한 네 친구의 이야기다. “같이했던 감독님이 저를 또 한 번 불러준다는 게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현장이 더 커졌다는 것도 뿌듯했고요. 누군가와 같이 시작해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게 의지가 되고,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또 다른 신작도 있다. ‘검은 사제들’(2015)을 연출한 장재현 감독의 신작 ‘사바하’에선 신흥 종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청년 신도 역을 맡아 이정재와 호흡을 맞췄다. ‘타짜’ 3편(감독 권오광)에도 최근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바야흐로, 완벽함에 다가서는 ‘노력 천재’ 박정민의 시절이 시작됐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