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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전쟁 확전 땐, 올 성장률 2.9% → 2.5% 하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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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미국에 유정용 강관을 수출하는 A사는 2016년도 수출 물량에 대해 관세를 3.9% 물었다. 그런데 미국 상무부는 덤핑 마진에 대한 재심을 통해 그해에 이 회사 관세율을 24.9%로 다시 산정해 적용했다. 지난해에는 무려 46.3%의 반덤핑 관세율을 적용하더니 이마저도 재심을 통해 75%로 높였다. A사 관계자는 “사실상 수출하지 말라는 조치 아니냐”며 억울해했다.

미·중 싸움에 끼인 수출 코리아 #GDP 대비 양국 무역의존도 69% #전자부품 포함 중간재 가장 큰 타격 #철강·반도체 당장 큰 피해 없지만 #쿼터 축소, 과징금 폭탄 가능성 커져 #“중, 빗장 푸는 분야서 기회 잡아야”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미국이 수출 물량에 갑작스레 높은 관세율을 적용할 수 있게 된 근거는 2015년에 반덤핑 관련 규정을 개정해 만든 ‘특별시장상황(PMS·Particular Market Situation)’ 조항 때문이다. 수입품의 판매가나 원가에 왜곡이 있다는 미국 조사당국의 결정이 있으면 기업이 제출한 원가 정보를 인정하지 않고 반덤핑 관세를 물릴 수 있는 조항이다. 미국은 이 조항을 중국산 제품을 겨냥해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피해는 한국 기업이 보고 있다. PMS 제도 변경 후 미국은 반덤핑 관세를 일곱 차례 재심했는데 이 중 5개가 한국산 제품이었다.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되면서 이런 ‘새우 등 터지는’ 일이 산업 전 분야로 확산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수출 주도형인 우리나라는 ‘빅2’ 국가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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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24.8%·홍콩 포함 시 31.6%)이 가장 높은 국가다. 미국은 중국 다음으로 한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12%·2위)이 높다. 한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양국 무역의존도는 68.8%에 달한다.

이번 무역제재는 양국이 서로의 수입 제품에 관세를 매기는 일이어서 한국이 소비재 형태로 미·중에 수출하는 제품은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중간재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의 완성품 속에 들어가는 부품에 한국산이 많다. 예컨대 중국이 미국에 수출하는 TV가 고율 관세로 타격을 입어 판매가 줄면 여기에 들어가는 한국산 디스플레이나 전자부품은 직접 타격을 받는다. 지난해 한국의 대중 수출에서 중간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78.9%(1121억 달러, 약 125조2200억원)나 됐다.

수출 비중이 높은 전자·반도체 기업의 경우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무역전쟁 장기화로 세계 소비시장이 위축되면 전자·반도체 분야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의 40%가량은 중국으로 수출된다. 이들 물량은 대부분 중국 내에서 소비되고, 조립·가공돼 세트 형태로 미국에 수출되는 물량은 미미하다. 당장 타격은 크지 않다는 얘기다.

가전제품 생산도 2010년대 이후 ‘탈중국’ 행렬이 뚜렷하다. 삼성전자는 TV는 멕시코, 세탁기는 미국에서 주로 생산한다. LG전자 역시 TV 등을 멕시코에서 생산한다. 일부 냉장고와 가정용 에어컨만 중국에서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고 있는데, 현재는 관세 부과 대상 품목이 아니다.

하지만 두 나라의 무역전쟁이 장기화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령 중국이 반도체 가격 담합 등을 꼬투리 삼아 국내 기업에 거액의 과징금을 물릴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달성하겠다고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상태여서 언제든 반도체 강국인 우리나라를 상대로 초강수를 들고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또 “가전의 경우엔 미국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가입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거나 (가격 저항이 덜한) 프리미엄 라인을 대폭 강화하는 것이 대책인데, 이 역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철강 업체들의 걱정도 커지고 있다. 현재는 미국에서 할당받은 수출물량을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철강협회가 포스코 등 국내 업체들에 배분하는 방식으로 수출을 진행하고 있다. 쿼터를 넘는 물량은 미국으로의 수출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나 A사의 경우처럼 미국이 개별 업체에 대해 언제든 PMS 조항 등을 앞세워 관세를 물릴 가능성이 있다.

미국, 수입차 관세 25% 부과하면 한국 차 업계 189조원 손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보호무역주의가 장기화할 경우엔 쿼터 자체를 줄이자고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수입 자동차와 부품에 25%의 관세를 때리겠다는 ‘관세 폭탄’을 실행에 옮길 경우 한국 기업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수입차에 25% 관세를 부과할 경우 향후 5년 동안 662억 달러(약 73조7000억원)에 달하는 수출 손실이 발생한다. 이로 인한 간접 피해액까지 고려하면 손실액은 189조원에 달한다. 26개 현대기아차 1차 부품사와 835개 딜러사는 8일 “한국산 차량에 고관세를 물린다면 미국 일자리가 위협받는다”는 의견서를 미국 상무부에 전달했다.

국내 기업들은 이번 무역전쟁을 계기로 세계 각국이 동시다발적으로 관세를 올리는 상황도 우려한다. 관세 장벽이 높아지면 수출품의 현지 가격 경쟁력이 하락한다. 그 경우 국제 교역은 줄어들고, 현지 진출한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무역 구조가 바뀐다. 수출 의존도가 70%에 육박하는 한국은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 DBS은행은 미·중 무역전쟁으로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는 국가로 말레이시아·대만·싱가포르와 함께 한국을 꼽으면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기존 2.9%에서 2.5%로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이번 1단계 무역전쟁으로 한국의 수출이 2억3700만 달러(약 2647억원)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하면 이와 관련이 있는 대중 수출이 1억9000만 달러(약 2122억원) 줄고, 이에 맞서 중국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매기면 대미 수출도 4700만 달러(약 525억원) 감소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2단계 조치 시행에 나설 경우엔 피해 규모가 더 커진다. 총 수출이 3억3400만 달러(약 3731억원) 감소하면서 국내생산 규모가 8억500만 달러(약 8992억원)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산업계에 다양한 대응책을 주문하고 있다. 먼저 미·중 무역전쟁이 만들어낼 새로운 사업 기회에 주목하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과 갈등이 심해지면 중국은 자국 시장을 개방하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어서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이 빗장을 푸는 영역에서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면 기존 무역 규모가 축소되는 부분을 상당히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중국 정부는 지난 1일자로 식품 등 소비재(15.7%→6.9%), 자동차(25%→15%), 차량 부품(8~25%→6%)의 관세를 일괄적으로 인하했다. 미국 수출 감소로 인한 내수시장 위축을 우려한 조치다.

미국 시장에서도 사업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주원 경제연구실장은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중국 제품을 대체할 만한 상품을 내놓으면 중국에 빼앗겼던 미국 시장 점유율을 되찾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무역전쟁 장기화에 대비해 한국 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을 재편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조철 선임연구위원은 “중간재보다 소비재 수요를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확대하고, 인도·동남아 등 성장하는 국가를 중심으로 수출 다변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희·문희철·이상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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