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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지하철 페미니즘 광고 금지 논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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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호 34면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이런 게 페미니즘 ‘백래시(backlash·사회적 변화에 대한 반발)’가 아니고 뭘까.

잇따른 페미니즘 광고 게시 불허 #페미니즘 호도, 반격 시도일 뿐

서울 지하철 역사에 개인·단체의 주장이나 성·정치·종교·이념 등의 메시지가 담긴 의견광고가 금지된다. 대통령 생일축하·페미니즘 광고 등이다. 민원과 갈등이 많다는 이유다. 김태호 서울교통공사 사장은 “지하철을 자꾸 논란의 장으로 끌어들이지 말라”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5월 숙명여대생 350명이 외부인의 출입이 많은 축제 기간 중 학교 앞 지하철역에 걸기 위해 제작한 광고 게재를 거부한 바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불법촬영 반대 등을 담은 캠페인성 광고였다. ‘숙대 입구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허락 없이 몸에 손대지 말 것/몰래 촬영하지 말 것/ 함부로 건물 내부에 들어가지 말 것…’ ‘이 일은 금세 끝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등의 평이한 문구였다.

여의도 버스정류장에 ‘우리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즘/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란 광고를 내려던 한 대학생도 비슷했다. 구청 관계자로부터 “페미니즘은 어느 한쪽이 가진 신념이며 반대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구청 옥외광고심의위원회 통과가 어려울 것”이란 말을 들었다.

일단 서울 지하철의 의견광고 불가 방침은 시대착오적이다. 가령 대통령 팬클럽 광고가 대통령 지지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거부감을 살망정, 그걸 아예 불허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공간이니 오히려 다양한 의견이 게시되는 것이 맞다. 교과서에 나올 수준의 페미니즘 메시지를 금하는 근거 역시 찾기 힘들다. 다수가 동의하기 힘든 극단적 주장을 담은 것도 아니고, 성평등이 사회악도 아닌데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성평등 정책 의지를 강조하면서 “여가부만이 아니라 각 부처가 책임져야 하는 고유의 업무로 인식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대로라면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아래 각 부처가 성평등 관련 공익광고를 제작해도 지하철에는 ‘논란이 예상돼’ 집행 못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도 지하철 곳곳에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상업광고들이 넘쳐난다. 헐벗은 소녀들의 게임광고,  S라인과 ‘착한 가슴’을 강조하는 성형외과 광고가 부지기수다. 왜곡된 성 인식 확산의 주범으로 꼽혀온 것들이다.

여성 인권 향상과 성평등을 촉구하는 페미니즘은 그 자체가 사회적 논란거리거나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불편하거나 싫을 수는 있어도, 혹은 그 운동 방식을 문제 삼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 논란이 된다면 성대결로 흐르는 일부의 극단적인 페미니즘이나, 상식적 페미니즘조차 남성박멸·여성우월주의라며 폄훼하고 오도하는 백래시 자체다.

오늘도 거리에는 3만여명의 여성이 몰려나올 예정이다.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3차 시위다. ‘생물학적 여성’의 참가만을 허용하고, 일부 과격한 발언이 논란을 낳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으며 우리 사회가 그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잠깐 지하철 얘기를 더 해보자면, 지난해까지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는 이런 시가 걸려 있었다. ‘미로와 같은 폰 속을 헤집고/ 그 애를 당겨본다/ 엄지와 검지 사이/ 쭈욱 찢어지도록 가랑이를 벌린다’(‘줌인’). 지하철 시 시민공모전에서 당선된 시로, 휴대폰 속 딸 사진을 보며 그리움을 느끼는 아버지의 심정을 담았다는 황당한 설명이었다. 금지시킬려면 이런 걸 금지시켜야 한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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