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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다수결과 사법 민주화는 다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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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직접 검찰에 고발할 수는 없지만 필요한 협조를 다하겠다.’

사상 초유의 사법부 핵심을 향한 검찰 수사의 신호탄이 된 지난달 15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대국민 담화 요지다. 김 대법원장이 사법발전위원회(5일), 법원장 간담회(7일), 전국법관회의(11일), 대법관 간담회(12일)의 의견을 모두 듣고 내린 결론이었다. 담화는 법관회의의 결론과 거의 같았다.

지난해 9월 김 대법원장 취임 후 사법부에선 평판사들의 다수결이 의사 결정의 핵심 기제로 등장했다.법관회의를 주도해 온 진보 성향 법관들의 주장대로 법관회의의 상설 의결기구화는 사실상 실현되고 있다. 전직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의 PC에 대한 강제 조사를 관철했고 검찰 수사에 대한 대법원장의 입장을 견인했다.서울중앙지법은 어떤 판사가 어떤 재판부를 맡을지도 법관회의에서 정하기로 했다. 사법부가 민주화된 것일까.

이용훈·양승태 대법원장을 거치며 비대화된 법원행정처의 관료제가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재판 거래 의혹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다시 ‘사법 민주화’가 키워드로 부상했다. 이는 법관들의 좌우 대립 속에 ‘0’에 가까워지고 있는 사법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한 절박한 과제일 수도 있다.

문제는 평판사 다수결이 국민 의사의 반영이라는 의미의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점이다. 전임 대법원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판사들 역시 국민의 평균적 학력·계층·지역 분포와는 거리가 먼 그저 판사들일 뿐이다. 평판사 다수결이 관료제에 비해 국민 일반의 의사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을 필연적 이유가 없다. 이미 법관회의는 국민 다수가 반대해 폐지된 향판(지역 법관) 부활을 주장해 왔고, 현직 판사의 70%는 국민 다수가 바라는 하급심 판결문 공개에 반대하고 있다.

평판사 다수결은 법원행정처 간부들로부터 ‘법관 독립’을 지키는 데 요긴할진 모르나 법관 사회의 정치적 분열을 가속화해 재판의 당파성을 강화할 위험도 크다. 양 대법원장 시절 주류 판사들이 법치주의를 ‘엘리트 법관에 의한 지배’로 잘못 읽었다면 사법 신주류들은 사법 민주화를 ‘우리끼리 다수결’로 오독하는 건 아닐까.

사법 민주화의 핵심 테마는 따로 있다. 도입 10년이 넘은 국민참여재판을 배심제로 전환하는 문제, 대법관 추천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할 경로를 설계하는 문제 등이다. 이전 대법원장들이 실패한 상고심 적체 해소와 1심 강화도 촌각을 다투는 과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사법부 내 권력 교체가 아니라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은 의견을 수렴하느라 그런지 1년이 다 되도록 말이 없다.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