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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삼양라면 첫 도입…먹고 사는 문제가 인권이고 복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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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김종필 '신보수 르네상스' 10계명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9년 뒤 문재인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깨어있는 시민정신'이라는 씨앗을 뿌렸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폐허를 딛고 싹을 틔웠다. 지금 세상을 주름잡는 진보 정치는 노무현은 노무현대로, 문재인은 문재인대로 각각 자기 시대에서 제출받은 숙제를 해냈기 때문에 꽃을 피웠다.

"배고픈 나라는 민주주의도 못한다" #그는 5·16때 진보적인 군부 운동권 #노무현이 진보 정권의 씨 뿌렸듯이 #김종필도 보수 부활의 터 될 수있어 #신보수, 유머와 여백 있어야 안 질려 #자유민주주의는 불멸의 국가 가치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미국, 약한 동맹국은 언제든 버려" #애민하는 좋은 공산주의자도 있다 #김정은에 선대 좋으나 환상은 금물 #정권 오만해지면 순식간에 뒤집혀 #평생 남긴 재산 신당동 집 한채가 다

십여일 전 세상을 뜬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부여 고향에 아내와 함께 묻혀 있는데 생전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JP의 죽음은 가을에 오동잎 떨어지듯 자연스러웠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색깔이 달랐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이 하기에 따라 김종필의 죽음도 노무현의 씨앗처럼 어떤 신호탄이 될지 모른다. 그것은 아마 '보수 재생(再生)'의 신호일 것이다.

기질적으로 살필 때 전형적인 진보인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편이다. 반면 보수인은 지난 시절 경험했던 최선의 상태를 오늘에 재현하려는 성질이 있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적 인간형을 재발견했고, 동양의 공자(孔子)는 고대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 사회상을 재구성했다.

한국 보수 세력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JP의 인생 역정을 탐색하다 보면 보수를 재생·재현하거나 재발견 혹은 재구성할 풍부한 자원들을 만나게 된다. 흥미롭게도 JP는 5·16 혁명을 일으킬 때 '진보적'인 '군부 운동권'이었다. 1970~80년대 '학생 운동권'이 꿈꿨던 혁명을 그는 1961년 박정희 소장을 앞세워 결행했다. 미래의 부유한 유토피아를 그리며 과거에 없던 길을 새로 냈다는 점에서 그는 진보주의자였다. 5·16은 이전 정권들의 민주주의로 포장된 부패·무능·혼란을 청산하고 공산화의 위험성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5·16은 당대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박정희와 김종필 집권 세력은 18년 만에 국가 제도와 시스템을 근대화했고, 명망가 중심의 붕당(朋黨)적 정치권을 대중정당 체제로 변모시켰으며 죽기 살기로 외자를 끌어들여 산업 인프라 구축, 수출주도형 개방경제를 성공시켰다.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배고픔에서 해방되었다. 5·16 군사정권에서 JP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삼양 라면이 처음 생산됐다. 70년대 초 정권이 명령하듯 밀어붙여 통일벼 품종이 개발됐다. JP는 국가 혁신가였다. (*일제 해방 뒤 공산주의의 길을 걸은 김일성 정권의 3대 세습자가 2012년 집권 연설에서 "인민에게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사회주의적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주민은 여전히 배고픈 북한과 비교해 보라.)

JP는 5·16이 형식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쿠데타라는 점을 뼈아프게 여겼다. "쿠데타, 그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 두 번 다시 할 거 아니야(1995년 전두환의 신군부를 처벌하는 5·18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면서)." 그렇다고 5·16의 혁명적 가치가 소멸하지 않는다. 3600명의 반란군이 움직이는데 단 한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혈혁명이었다. JP는 "쿠데타든 혁명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세상을 뒤집어 국민이 잘살게 됐으면 그만이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해. 배고픈 나라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어"라고 설파했다.

요새 길 잃은 보수 정치권에서 '신보수''개혁 보수''탈냉전 보수' 같은 말들이 많이 나온다.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 같다. 세상에 감동을 주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묵직한 내용을 깡통에 담고 싶다면 JP를 학습하길 바란다. 김종필은 신보수의 젖줄, 탈냉전 보수의 교과서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필자는『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2016년 출간)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면서 2014년 가을부터 14개월간 그를 100여 차례 인터뷰했다. JP가 남긴 정치적 자산을 하나씩 따져 본다.

2015년 ‘김종필 증언록’ 연재 당시 김종필 전 총리와 전영기 기자(오른쪽). [중앙포토]

2015년 ‘김종필 증언록’ 연재 당시 김종필 전 총리와 전영기 기자(오른쪽). [중앙포토]

①인간의 향기, 비유와 여백= 그는 유머를 즐겼다. 운명하기 한 달 전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내 입이 밥을 초청하지 않아"라는 농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입맛이 없다는 소리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극한적 순간에도 자신과 상황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사람만 이런 유머를 던질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태도가 거의 본질"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품격있는 보수 정치에서 "유머는 거의 본질"에 해당한다. JP는 1995년 자신과 김대중을 세대교체론으로 몰아내려는 정적들을 스스로 번역한 영시 한 수로 응대했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이상을 잃을 때 비로소 늙게 된다(새뮤얼 울만의 청춘)." 정치는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직업이다. 인간의 향기, 비유와 여백이 있어야 질리지 않는다.

②자유민주주의는 불멸의 가치= 김종필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육군본부 정보국의 북한반장이었다. 그날 새벽 당직 근무를 섰다. 위도 38선 세 곳을 탱크 부대를 앞세워 뚫고 내려온 김일성 공산군의 실체를 확인해 전 군에 비상령을 내렸다. 김종필 중위는 전황 보고를 받는 육군 참모총장이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담배를 든 채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기억했다. 무기 없는 국방, 훈련 없는 군대는 그저 도망치기에 바빴다. 20대 초반 김종필의 육사 8기 동기생은 1200명이었는데 6·25 전투에서만 400명가량 전사했다. 죽은 한국군이 14만명, 유엔군이 6만명,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가 25만명이었다. 이 모두가 김일성이 한국을 공산화하려는 야심 때문에 벌어졌다. JP와 동시대인이 피로써 지키려 했던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였다. JP에게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신앙이었다.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③경제력 없으면 껍데기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피가 아니라 빵을 먹고 자란다"는 JP의 지론이다. 그는 가난한 장교 시절 손수 집을 지어 집 장사를 하기도 했고, 정치를 떠나(60년대 후반) 감귤 농장과 젖소 목장을 운영해 돈을 벌기도 했다. 맹자(盟子)의 가르침인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생업이 없으면 마음이 정처 없이 떠돈다)'은 JP가 미리 쓴 묘비명에도 들어있는 말이지만 젊을 때부터 터득한 인간의 본성이요 치국(治國)의 원리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권이고 복지다. 경제력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껍데기 민주주의다. 지속가능성이 없다.

④키신저식 열강주의 외교는 사절= 김종필은 자기보다 세 살 많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싫어했다. 키신저는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월맹) 간 평화협정을 맺어 남·북 베트남에 평화를 가져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탔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남베트남(월남)은 무력으로 공산화됐다. 월맹 공산주의자들이 미국과 월남을 그럴듯한 평화로 속인 것이다. 키신저는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총리와 식사를 하면서 평화협정에 대해 꽤 자랑을 늘어놨는데 박 대통령이 "월남은 당신 때문에 종말이 시작됐다"고 쏴붙였다고 한다. JP는 "동맹국이라 해도 미국을 무조건 믿지 마라. 키신저같이 자국 이익을 위해 약한 동맹국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경계했다.

⑤자주적 방어 의지 없으면 미국은 떠난다= 1970년대는 월남, 90년대는 필리핀 등 미국은 스스로 방어 의지가 없는 나라들로부터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 뒤 월남은 망했고 필리핀은 중국에 영해를 빼앗겼다.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다 실패한 것은 자유·공산 진영 간 세계적 냉전 속에 중화학 공업과 산업화의 나라로 성장한 한국을 버리는 게 미국의 손해라는 자체 평가 때문이었다. 한미동맹의 진실은 한국의 자체 방어 의지, 무력과 경제력이 강할수록 미군이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 상황이 벌어지면 동맹은 언제든지 무력화될 것이다.

⑥좋은 공산주의자도 있다= JP는 관념보다 힘과 현실을 중시했다. 공산주의자 중에서 중국의 덩샤오핑과 베트남의 호찌민을 존경했다. 그들은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정치력을 집중했다. 덩샤오핑이 1980년대에 추진한 과학·교육 경쟁력 강화 정책, 치열한 국내 권력투쟁을 거쳐 확립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높이 평가했다. JP는 김일성 3대 세습체제가 공산주의 중에서도 악성인 반인권, 전체주의 사회로 퇴행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만일 김정은이 그런 걱정을 불식하고 인민을 위해 대규모 경제 개발로 방향을 튼다면 JP도 돕자고 할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를 선의로 대하는 것까지 말릴 수 없지만, 환상은 갖지 말라는 게 김종필식 보수의 생각이다.

⑦민심은 조련사 물어 죽이는 맹수= JP는 민심을 두려워했다. 정권이 좋은 실적을 내도 오만해지는 순간 민심의 바다가 뒤집어 버린다고 했다. 60년대 미국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은 "맹수는 평소 아무리 조련사가 잘해 줘도 작은 잘못 하나로 바로 물어 버린다. 유권자는 맹수와 같다"고 조언했다.

⑧가슴에 못 박는 원한 정치 하지 말라= 김종필은 김대중이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면서 호남 민심이 폭발할 지경이라는 것을 느꼈다. 1997년 보수주의 원조인 김종필은 같은 보수인 이회창을 버리고 진보 쪽의 김대중 손을 들어 줬다. 그는 자기 집을 찾아온 김대중에게 "호남의 한을 풀어 드리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 빚을 갚겠다"며 DJP 후보 단일화에 응했다. JP는 자신이 국무총리였던 박정희 시대 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저지른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이 늘 마음의 부담이었다.

⑨탈냉전·남북평화 하려면 국내 정치 통합부터= JP한테 한 번은 노태우·김영삼한테 붙고(1990년 3당합당), 다른 한 번은 김대중한테 붙은(1997년 DJP 후보 단일화)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JP의 철학과 셈법은 다르다. "90년은 세계사적으로 탈냉전이 진행돼 소련 해체, 동구 공산주의 붕괴가 진행되던 시기다. 여야, 보수·진보가 힘을 합쳐 압도적으로 정부의 북방외교를 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3당 합당을 했다. 정치권의 일치단결에 힘입어 한·소(90년) 및 한·중(92년) 수교가 가능했다."

JP가 97년 DJP 공동정권을 준비하면서 했던 말도 "통일 시대를 대비하려면 국내 정치통합이 먼저다. 산업화 민주화 세력, 김종필과 김대중 세력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JP의 국내 통합, 정치권 일치론은 현재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북한 비핵화 국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⑩맨몸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가다= 김종필이 숨질 때까지 미워했던 사람은 전두환이다. 전두환은 1980년 집권 과정에서 JP를 수백억 원대 부정축재자로 몰아 서빙고 보안사에 구금시켰다. JP의 장례 과정에서 기자가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김종필의 재산은 서울 중구 신당동에 대지 200평짜리 자택이 전부였다. 남은 이들은 고향 부여에 묻힌 JP 부부의 가족묘 관리 비용을 걱정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십년간 주장했던 수백억 원, 혹은 수천억 원대의 재산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이 국고에 강제로 환수시킨 재산은 JP가 오래전 '운정재단'이라는 비영리 장학자금에 기증한 제주 농장, 서산 목장이었다. 농장과 목장은 전두환의 환수가 없었더라도 이미 JP가 손댈 수 없는 물건이었다. JP는 5·16을 쿠데타라고 부르는 사람보다 자신을 부정축재자로 둔갑시킨 전두환을 더 미워했다. 사석에서 "미운 놈 먼저 죽는 걸 봐야 할 텐데"라는 농담도 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