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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해설자가 불가능하다 한 샷을 성공시킨 박성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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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대 데이비드 존스와 상의하는 박성현. [EPA/TANNEN MAURY]

캐대 데이비드 존스와 상의하는 박성현. [EPA/TANNEN MAURY]

“이 샷을 그린에 올릴 수 없다. 하면 안 된다. 왜 캐디가 저 샷을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LPGA 투어 선수 출신의 영국 스카이 스포츠의 해설자인 트라이시 존스턴은 2일(한국시간) 열린 여자 PGA 챔피언십 최종라운드 16번 홀에서 박성현이 해저드에서 볼을 치려할 때 이렇게 말했다.

기자가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다. 러프가 매우 길었고, 공이 물에 아주 가까이 붙었으며 경사도 만만치 않았고 바람도 강했다. 신발을 신은 채로 물에 들어가 꼼꼼히 라이를 살피는 캐디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지만 그냥 치기로 한 결정은 현명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됐다.

16번홀에서 공의 라이를 확인하는 박성현. [USA TODAY=연합뉴스]

16번홀에서 공의 라이를 확인하는 박성현. [USA TODAY=연합뉴스]

박성현의 샷이 위험해 보였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여성 투어에서 이런 고난도 샷 시도 자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이 물에 들어가 샷을 하는 건 가끔 볼 수 있지만 러프가 깊지 않을 때다.

선수 출신인 해설자 존스턴도 충분한 경험에 의해 판단해 “하면 안 된다”고 잘라 말했을 것이다. 그는 LPGA 3승, 유럽여자투어 11승을 했다. 역대 최고 여성 골퍼라는 안니카 소렌스탐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다.

박성현은 긴 러프의 저항을 이겨낼 엄청나게 강한 샷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축이 흔들리면 헤드가 물이나 러프에 잡히거나 공 밑으로 그냥 지나가 더블보기 이상의 대형사고가 날 수 있다. 탈출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거리를 맞춰 핀에 붙일 확률은 희박하다.

반대 쪽 러프로 가거나 그린에 간신히 올려 2퍼트를 하는 결과가 나올 텐데 아예 언플레이어블 볼을 선언하고 보기를 노리는 편이 나아 보였다.

이런 샷을 멋지게 성공시키는 건 남자 투어에서도 자주 안 나온다. 파 세이브를 했다면 골프 채널 오늘의 하이라이트 1번 소재다. 타이거 우즈나 필 미켈슨 같은 쇼트게임 귀재들이 하는 것이다.

현재 고진영의 캐디인 베테랑 딘 허든(52)은 “전성기 안니카 소렌스탐은 물론 (힘 좋은) 아리야 주타누간, 청야니, 로레나 오초아도 하기 어렵다. 혹시 (운동 능력이 아주 좋은) 렉시 톰슨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저런 샷을 하고 물에 빠지지 않을 운동능력을 가진 여자 선수는 박성현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든의 말처럼 긴 러프를 이겨낼 힘과 더불어 밸런스도 중요하다. 격렬한 스윙 후 조금이라도 중심을 잃으면 경사지라 골퍼가 물에 빠질 수도 있다.

 샷을 하는 박성현. 겉보기엔 격렬하지 않아 보이지만 러프를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목의 힘줄이 설 정도로 강한 스윙이었다. 클럽 헤드에 러프가 엉킨 모습도 인상적이다. [USA TODAY=연합뉴스]

샷을 하는 박성현. 겉보기엔 격렬하지 않아 보이지만 러프를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목의 힘줄이 설 정도로 강한 스윙이었다. 클럽 헤드에 러프가 엉킨 모습도 인상적이다. [USA TODAY=연합뉴스]

박성현은 이 샷을 핀 1m 이내에 붙여 파세이브를 했다. 공은 거의 80도 정도의 수직으로 떠올라 그린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평소 액션이 거의 없는 박성현이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긴장된 샷이었다.

박성현은 “공의 위치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캐디가 '공 밑에는 물이 전혀 없으니 자신 있게 하라'고 했다. 그 말이 힘이 됐다. 그래서 좋은 샷이 나온 것 같고, 그 샷으로 인해 연장전까지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보기엔 박성현이 겸손하게 얘기하는 것 같다. 송경서 JTBC 해설위원은 "공 놓인 상태가 나쁘지 않았더라도 박성현 특유의 공격적인 성향, 또 남자 선수 같은 손목힘과 정확한 컨택트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샷"이라고 말했다. 박성현은 다른 여성 선수들은 해 보지 않은 도전에 성공했다.

평소 액션이 거의 없는 박성현은 샷을 한 후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좋아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샷이었다. [USA TODAY=연합뉴스]

평소 액션이 거의 없는 박성현은 샷을 한 후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좋아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샷이었다. [USA TODAY=연합뉴스]

박성현의 힘은 역시 16번 홀에서 치러진 연장 두 번째 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박성현은 정규 경기 16번 홀에서 뒷바람에 밀려 티샷이 너무 멀리 나가 물가 내리막 러프에서 두 번째 샷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연장전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티샷을 짧은 클럽으로 쳤다. 그래서 유소연보다 더 먼 곳에서 두 번째 샷을 해야 했다. 뒷바람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박성현은 강한 스핀으로 공을 핀 옆에 세웠다. 더 가까운 곳에서 친 유소연의 공은 홀을 좀 지나갔다. 박성현이 버디를 잡고 승리한 원동력이다.

샷 후의 박성현. 경사가 만만치 않다. 스윙 후 넘어지지 않은 자체도 대단하다.[USA TODAY=연합뉴스]

샷 후의 박성현. 경사가 만만치 않다. 스윙 후 넘어지지 않은 자체도 대단하다.[USA TODAY=연합뉴스]

박성현의 16번 홀 해저드샷은 ‘박세리 맨발의 투혼급’이다. 둘 다 대단하지만 약간 성격이 다르다. 당시 박세리는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 위기를 극복했다. 샷도 쉽지는 않았지만 드라마틱한 외부 배경이 더 어필했다.

98년 US오픈에서 박세리는 공을 해저드 밖으로 쳐낸 것이고 박성현은 위험천만한 로브샷을 핀 옆에 세운 것이다. 박세리는 당시 파 세이브를 못했고 박성현은 파세이브를 했다. 박성현은 이전에는 본 적 없는 LPGA 투어의 역대급 샷을 보여줬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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