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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말하기를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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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80년 전통의 설렁탕 집에서 깍두기가 사라졌다. 이거 실화 맞다. 오랜만에 찾아간 노포(老鋪)의 탁자 위엔 배추김치 항아리만 덜렁 놓여 있었다. 국에 만 밥을 신김치 얹어 후루룩 넘기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깍두기의 부재를 내내 아쉬워했다. “무가 너무 비싸서 깍두기 못 담그셨나 봐요.” 망설임 끝에 건넨 말에 주인장이 휘휘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어머, 김치 밑에 깍두기 있어요. 항아리 두 개 놓으면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 합쳐 둔 건데.” 연신 미안해하는 내 곁으로 다른 손님이 슬쩍 다가오더니 귀띔을 했다. “쳇, 핑계 대기는. 바닥에 있는 둥 없는 둥 깔아 놓고선.”

먹고살자고 둘러대는 상인들 궁색한 변명은 이해할 만 #진정성 1%도 없는 정치인 ‘맘 따로 말 따로’는 짜증 나

문득 몇 해 전 기억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단골집 감자탕에서 별안간 감자가 실종됐던 사건이다. 알 굵은 감자가 통째로 여럿 들어 있어야 마땅할 탕 속을 아무리 휘저어 봐도 깍둑썰기 한 조각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붕어빵에 붕어 없는 건 몰라도 감자탕에 감자 안 든 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내게 사장님이 쩔쩔매며 내놓은 해명은 이랬다. 요새 손님들 입맛이 변해서 감자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그래서 대신에 우거지를 많이 넣은 거라고.

감자랑 무 같은 채솟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지난 몇 달 새, 아마 적잖은 식당에서 이런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을 게다. 사 먹는 사람 입장에선 무김치나 통감자를 맛보지 못하는 섭섭함, 그 이상으로 파는 사람이 내놓는 궁색한 변명에 마음이 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인들이 이리저리 둘러대는 말쯤이야 굳이 이해 못 해줄 것도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절박함에 별수 없이 지어낸 소리일 테니 말이다.

요즘 정말 들어주기 힘든 말은 대개 정치인들 입에서 나온다. 선거 전에도 온갖 말 같지 않은 말들이 넘쳐나더니 선거 뒤에도 하나 마나 한 소리가 도처에서 쏟아지고 있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 “부덕의 소치”…. 패장들이 내놓는 반성의 언어가 대표적이다. 남 탓하는 것보다야 ‘내 탓이오’ 하는 게 낫긴 하지만 문제는 진정성이 1%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마음과 말이 따로 노는 탓이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썼던 영어 관용구(The buck stops here!)까지 들먹이며 쿨하게 책임지는 듯했던 제1 야당의 전 대표만 해도 그렇다. 불과 열흘 남짓 만에 “내가 나가면 당 지지율이 오른다고 했다. 과연 오르는지 두고 보자”며 불편한 속내를 들통 내고 말았다.

정계 은퇴 요구까지 받고 있는 제2 야당의 전 대표는 침묵 끝에 정치인 특유의 알쏭달쏭 화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성공이 끝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완전히 마지막도 아니다. 계속 일을 이어갈 수 있는 용기가 가장 중요하다.” 영국 처칠 총리의 명언을 인용했다는데 얼핏 듣기에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소리 같긴 하다. 하지만 후폭풍을 우려한 듯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즉답은 피했다. 나중에 기회를 마련한다니까 그때까진 알아서 새겨들으란 소린데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이란 반응이 많다.

자신의 안위에 아랑곳없이 진심을 담아 전하는 말 한마디의 감동을 맛보게 해준 건 다름 아닌 배우 정우성씨다. 유엔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인 그는 최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SNS에 올린 글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제주에 밀려든 예멘 난민 탓에 급속히 확산된 우리 사회의 반(反)난민 정서 때문이다. 그 와중에 지난주 제주포럼의 난민 관련 세션에 정씨가 나온다고 하니 과연 어떤 얘길 꺼낼지 모두의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타인종·타민족·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대하면서 어떻게 우리 아이에게 ‘너는 세상을 사랑해라’ ‘너는 세상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나. 이해나 관점의 폭을 조금 더 확장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후에 한 인터뷰에선 대중의 인기로 먹고 사는 직업의 특성상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생각이 있어도 침묵한다면 방관자가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에두르지 않고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토해내는 말은 그렇게 힘이 셌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