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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시각각

김정은 ‘줄타기 외교’가 성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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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필자는 얼마 전 외교안보 당국과 관계가 긴밀한 여권 핵심 인사를 만났다가 쇼킹한 얘기를 들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9일 두 번째로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술을 마시며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했다고 한다. 주흥이 무르익자 김정은은 ‘난 비핵화 의지가 확실하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국과 손잡겠다. 미국이 원산에 투자해 카지노를 지어 달라. 미 군함의 원산 기항도 가능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원산 미함 개방’으로 미 사로잡은 듯 #비핵화 실천 안 따르면 말짱 도루묵

미 군함의 원산 진출은 미국에 엄청난 노다지다. 중국군의 집중 포화에 노출되는 서해와 달리 동해 원산은 미 군함이 안심하고 미사일로 베이징을 때릴 수 있는 최적지다. 또 중국과 러시아 함대의 동해 진출도 봉쇄할 수 있는 요충지다. 동해가 ‘미국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김정은이 어떤 조건을 달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철천지 원수인 ‘미제’의 국무장관에게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놀랍기 그지없다.

여권 핵심 인사는 “폼페이오는 김정은의 이 말에서 비핵화 의지를 확신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과 만나라고 강력히 권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지난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내 체면만 세워주면(Make face) (미국의 최대 관심사인) 대륙간탄도미사일과 관련 시설을 확실히 폐기하고 비핵화를 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회담 전후 과정에서 북한 측으로부터 “중국은 5000년간 우리의 적국이었다. 벗어나려면 미국과 손잡을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이 인사는 “트럼프가 회담 뒤 김정은을 ‘똑똑한 인격자’라 극찬하고 한·미 연합훈련 중단 선언에다 ‘CVID’까지 빼준 건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개선장군으로 귀국해야 비핵화를 밀어붙일 명분이 생긴다”는 김정은의 요청을 트럼프가 장사꾼의 본능으로 받아줬다는 해석이다.

이 여권 인사는 김정은이 자신을 철저히 베일에 감추고 베이징을 찾았던 1차 방중 당시 “문제의 방문객은 김정은”이라고 미리 맞혔을 만큼 정보력이 있는 정권 핵심의 한 명이다. 그의 전언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은 70년간 적대관계였던 북·미 관계를 180도 뒤집을 수 있는 혁명적 발언을 한 셈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후 김정은의 행보다. 싱가포르에서 귀국한 지 일주일 만에 중국으로 날아가 시진핑 주석에게 “북·중은 한 가족”이라며 철썩 달라붙었다. 기분이 좋아진 시진핑은 김정은에게 밀무역 묵인, 합작투자 재개 같은 선물을 안겨줬다. 북·미 정상회담 뒤 보름이 지났지만 북한이 비핵화 후속 협상을 미적대고 있는 건 이런 중국의 지원 덕분에 커진 뱃심 탓일 공산이 크다.

하지만 김정은의 미·중 등거리 외교는 그야말로 외줄타기 리스크다. 약소국의 등거리 외교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되면 강대국은 언제든지 압박으로 돌아서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당장 폼페이오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 미국 안보 3인방은 28일 “북한이 신속하게 CVID를 약속하고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평화적 옵션은 금방 소진될 것”이라고 입 모아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예한 300개 넘는 추가 대북제재 카드가 여전히 살아 있음도 강조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북한 사회에 장마당이 보편화된 상황에서 김정은은 민심을 챙기지 않고선 등거리 외교로 시간을 끌 힘을 유지하기 어렵다. 요즘 북한 관리들은 우리 측에 “생리대 공장부터 지어 달라”고 매달리고 있다. 가임기 젊은이들의 민생 수요를 최소한이나마 충족해 주지 못하면 나라를 끌고 가기 어렵게 된 게 북한의 실상이다. 시간이 없다. 김정은의 결단이 주목된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