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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국가채무 방어선을 후퇴시키려는 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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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윤호 기자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대표
남윤호 도쿄 총국장

남윤호 도쿄 총국장

아베노믹스로 경제에 훈풍이 부는 일본. 부럽다고 하면 돌아오는 말이 있다. “재정적자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이 재정적자로 고생하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결정적인 계기는 버블 붕괴였다. 경기 띄운다며 재정 동원하고, 안 되면 또 넣고, 하는 식으로 확장적 재정정책을 계속했다. 또 부실 금융사에 공적자금도 많이 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일본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237%다.

나랏돈 더 쓰자는 정부·여당 주장은 #재정건전성에 애치슨라인 긋는 셈 #신용등급·국채값 하락 위험 커져 #적자로 고생하는 일본 참고해야

그래서 일본에선 경기회복 중에도 재정 파탄에 대한 걱정이 크다. 손 놓고 있으면 파탄 확률이 2035년 99.9%, 2040년엔 100%라는 추산이 이미 2년 전 나왔다. 얼마 전엔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8%인 소비세율을 38%로 높이든지 100조 엔의 국가 예산을 30조 엔으로 70% 삭감해야 한다는 시뮬레이션도 나왔다. 일본인들에겐 으스스한 얘기다.

재정 파탄이라고 해서 어느 날 나라 금고가 꽝 하며 깨지는 게 아니다. 시장에서 국채가 슬슬 안 팔리는 증상부터 먼저 나타난다. 그러면 국채값이 떨어지고, 금리가 폭등한다. 돈이 모자란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줄일 수밖에 없다. 국방·치안 등 필수 분야 외의 서비스들은 차츰 멈추고 만다. 금융위기도 세트로 일어난다. 시간이 갈수록 정부 신뢰가 떨어져 수습은 더 어려워진다. 결국엔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기다린다. 파탄으로 향하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는 아차 하는 순간 건너게 된다. 깨닫는 순간 물릴 수가 없다. 그 뒷감당에 온 국민이 큰 고생을 한다. 각국이 평소 조심하는 이유다. 독일은 기본법에 신규 국가채무가 GDP의 0.35%를 넘지 않도록 제한한다. 유럽연합(EU)은 매년 재정적자가 GDP의 3%, 공공부채 잔액이 60%를 넘으면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인도네시아에선 회계연도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으면 대통령 탄핵도 가능하다.

우리는 사정이 좀 낫다. 지난해 국가채무는 GDP의 38.5%였다. 이 비율이 100%를 넘는 문제아들이 수두룩한 데 비하면 우등생이다. 그래서인지 여유 있을 때 좀 쓰자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경기부양, 실업 해소, 지역개발을 위해 케인스식 재정정책을 쓰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케인스식 처방은 통할 때가 있고, 안 통할 때가 있다. 재정 투입한다고 경기가 다 살아나는 게 아니다. 안면에 강펀치 한 대 맞고 쓰러졌을 때 응급 조치로 일으켜 세워주는 게 케인스식 처방이다. 몸통에 잔매를 무수히 맞아 그로기 상태가 된 뒤엔 소용이 없다. 우리 경제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실업은 외부 충격보다 정책 실패와 구조 문제가 겹친 결과다. 근본 대책 없이 재정으로 단박에 풀자는 건 무지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요즘엔 국가채무 증가세 자체가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켜 성장을 제한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남윤호칼럼

남윤호칼럼

국가채무는 고령화 때문에 가만 있어도 늘게 돼 있다. 우리의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빠르다. 2000~2016년 채무 증가율은 연평균 11.6%였다. 재정위기를 겪었던 스페인(7%), 그리스(4.9%), 이탈리아(3.4%)보다 높다. OECD는 한국의 순채무가 2060년 GDP의 200%에 육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여당은 채무비율을 1~2%포인트 높여도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GDP 대비 38% 선에서 40%대로 채무 방어선을 후퇴시켜도 된다는 얘기다. 1%포인트 물러날 때 19조원의 나랏빚이 는다. 국가 경제의 안전보장과 직결된 재정건전성에 우리 스스로 애치슨라인을 긋는 셈이다. 재정건전성에 대한 한국의 방어 의지를 의심하는 시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시장은 재정에 느슨한 국가에 우호적이지 않다. 신용등급은 하락하고 해외 차입의 가산금리가 오른다. 일본의 신용등급이 한동안 보츠와나보다 낮았던 것도 재정적자 탓이었다.

무엇보다 더불어민주당의 재정 펌프질은 큰 위화감을 준다. 2016년 말 소속 의원 39명이 재정건전화법안을 발의하지 않았나. 법안엔 “향후 재정건전성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담겼다. 제7조엔 신규 국가채무를 GDP의 0.35% 이하로 한다는 조항이 있다. 금액으론 6조6000억원쯤이다. 법안을 낸 민주당이 지금은 나랏빚 수십조원 늘리는 걸 예사롭게 말한다.

정부 처신도 손바닥 뒤집기다. 기획재정부 역시 비슷한 때 같은 법안을 내 신속한 처리를 촉구했다. 국가채무를 GDP의 45% 이하로 유지하는 게 골자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여당의 확장 기조에 장단을 맞춘다. 관료에게 영혼이 없다지만 이젠 기억력도 놓아버렸나. 법안엔 재정건전성에 대한 국민 이해도를 높이는 교육 규정(17조)이 있다. 재정을 더 풀자는 판에 무의미해진 조항이니 자진 삭제를 권한다. 영혼에 이어 기억까지 분실했으면 낯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남윤호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