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양성희의 직격 인터뷰

“한국 축구, 악바리 정신만으로는 더 나갈 수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선수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일부 고약한 비난만 하는 사람들은 문제지만, 월드컵 때라도 열광하고 애정이 어린 비판을 하는 한 축이 있어야 축구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선수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일부 고약한 비난만 하는 사람들은 문제지만, 월드컵 때라도 열광하고 애정이 어린 비판을 하는 한 축이 있어야 축구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이만큼 극적이면서도 아쉬운 경기가 있을까.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러시아월드컵에서 세계 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끝내 16강에서 탈락했다. ‘전패, 아시아 꼴찌’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이 예상된 가운데 걷어 올린 소중한 1승. 롤러코스터급 반전 드라마였다. 완패가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른 선수들에게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축구는 냉면과 비슷한 속성 있어 #경기 규칙과 레시피 단순하지만 #그 맛을 내기는 쉽지 않고 오묘해 #한국축구, 총체적 전술·플랜 부재 #당장의 16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장기적 인식과 선수들 삶의 존중 #체계적인 산업화가 더 중요해져 #소프트웨어 바뀌어야 도약한다

그러나 아쉬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결과는 16강 탈락이다. 독일을 누른 쾌거가 있지만, 앞선 두 경기에서 드러난 전략 부재와 미숙한 플레이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해설자로 나선 박지성도 1, 2차전 패배 이후 “지금 이 모습이 한국 축구의 현실”이라며 “축구인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포츠 평론가인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를 만나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성취와 한계에 대해 들었다. 그 역시 “1승의 감격과 별개로, 체질 개선이 필요한 한국 축구의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1, 2차전과 3차전 경기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단 얘기다.
“인간이 하는 경기지만 알 수 없는 뭔가가 작용하기도 한다는 걸 절감한 경기였다. 일단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건 잘하려고 노력했다. 수비도 지능적으로 했다. 위치를 선점하고 정확하게 차단했다. 모두가 자기 인생의 소중한 90분을 120분처럼 뛰었다. 김영권, 문선민, 이재성, 손흥민, 조현우 등이 세계 최고와 겨룰만한 자질과 의지를 갖췄다는 것도 확인했다.”
관련기사

신태용 리더십은 어떻게 평가하나.
“신태용 감독은 위기의 팀을 확 바꾸어내는 임기응변이 강점인데, 그것이 이번 3차전에도 발휘됐다고 본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선진 기술을 팀에 부여하는 능력, 세계 흐름을 읽는 치열한 고민과 연구에는 아쉬움이 많다. 사실 한국 축구의 역사는 감독 경질의 역사다. 이젠 경질의 역사를 경질하자. 7월 말로 계약이 끝나는 신 감독이 아시안컵이 열리는 올해말까지 재선임될 경우 남은 기간 중 존재를 증명해보여야 한다.”
1, 2차전 얘기를 해보자.
“감독의 총체적인 플랜과 전술이 아쉬웠다. 그로 인해 선수들의 전술적인 결합도가 떨어졌고, 선수들의 개인 기술과 체력, 멘탈이 흔들렸다. 축구협회의 기술적 지원, 코칭 스태프의 전문성도 부족했다. 상대팀이 결정된 6개월을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리빌딩했어야 한다. 마지막 평가전들은 왜 그 팀들이 스파링 상대였는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트릭’일 수 있지만, 신 감독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스웨덴과 멕시코에 대한 분석은 ‘장신이라 느리다’ ‘쉽게 지친다’ 같은 안이하고, 더러는 인종적인 분석이었다. 악바리 정신이나 붕대 투혼의 시대가 아니다. 결연한 의지로 한두 경기는 이길 수 있어도 더는 나갈 수 없다.”
한국 축구의 문제점은 뭔가.
“한국 축구는 우리 사회 전반이 그렇듯이 아직 근대의 문턱을 제대로 넘지 못했다. 일정 수준의 인프라, 선수층, 재정 등 하드웨어는 있지만 그 너머로 도약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 코칭스태프의 분야별 전문성을 강화하고, 기술위원회에 스포츠 심리학자, 기술전략가, 축구문화 전문가 등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당장의 경기에서는 감독 중심으로 기술 분석이 치밀해야 하지만, 축구 문화 전반을 개선하고 체질 자체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경영, 심리, 문화 등 여러 전문가들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유럽의 감독이나 선수들에게는 그런 요소가 체화되어 있다. FC바르셀로나의 황금시대를 빚어낸 요한 크루이프, 우리의 전설 거스 히딩크, 아스널의 전 감독 아르셴 뱅거,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등의 몸속에는 축구 전술만이 아니라 세계 축구의 역사와 문화가 저장되어 있다.”
그런 것이 유럽 축구의 힘일까.
“요한 크루이프와 FC 바르셀로나 구단이 1990년대에 만든 FC바르셀로나 유소년학교(라 마시아)가 있다. 푸욜, 메시, 이니에스타 등 최고 스타들이 이곳에서 성장했다. 이승우도 여기 출신이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역설적인 의미로 축구를 ‘덜 가르친다’는 데 있다. 축구는 일주일에 정해진 시간만 익힌다. 나머지 시간에는 공부를 한다. 주말에는 FC바르셀로나의 최고 경기를 보고 당대의 스타들에게 몸으로 배운다. 이유는 세 가지다. 부상이든 은퇴든 언젠가 축구를 그만둔 후에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네트워크를 가르친다는 거다. 또 축구 이외의 학문과 세계를 알아야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축구를 중심으로 심리, 경영, 역사 등을 배운 이들이 나중에 구단 행정, 국제축구연맹(FIFA), 유럽축구연맹(UEFA), 스포츠산업 쪽으로 진출한다. 당장의 16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장기적인 인식, 선수들의 삶에 대한 존중, 체계적인 산업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소에는 축구 안 보다가 월드컵 때만 열광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태용 감독이 ‘K리그는 외면하다가 월드컵 때만 욕해서 부담된다. 3000만이 감독이다’ 이런 말을 했다. 이영표 해설위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축구가 아니라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 적도 있고. 일단 감독은 어느 나라에서든 욕먹는다. 그게 축구 보는 재미이기도 하고(웃음). 단순성과 복잡성이 결합된 축구는 냉면이랑 비슷하다. 경기 규칙이나 레시피가 단순하니 누구나 품평한다. 하지만 그 맛을 내기는 절대 쉽지 않고 오묘하다. 이 단순성(팬)과 복잡성(감독과 선수)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문화와 산업이 이뤄진다. 만약 평소 축구를 안 본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과연 K리그는 매력적인 문화콘텐트인가. 경기 수준, 팬서비스, 마케팅, 편의시설 등에서 같은 날 개봉한 영화나 유럽축구 또는 프로야구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K리그의 올 상반기 평균 관중이 5000여 명에 불과하다.
“만약 K리그가 일반 회사였다면 진작에 망했을 거다. 주먹구구식 운영에 오직 승부에 집착한다. 일부 기업 구단은 홍보 수단 정도로 여기고, 일부 지자체 구단은 아예 정치 수단으로 삼는다. 서너 개 구단을 빼고는 구단의 자생력이나 감독의 독특한 축구 철학이나 선수들의 지역 밀착 활동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프로 축구의 역사와 구단의 형성 과정에 의해 팬이 없어도 팀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역설적 상황이다. 연맹이나 구단 관계자들, 심지어 감독과 선수까지, 팬이 늘지 않아도 당장 일자리가 없어지지는 않는, 그야말로 ‘늪 축구’가 된 것이다.”
사실 축구팬들이 없는 건 아니다.
“90년대의 문화적 성장과 2002 월드컵 열기로 인해, 자신의 문화적 열광과 심미적 취향을 축구에 투영하는 거대한 세대와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은 밤새 유럽 축구를 보고, 축구게임도 한다. 이처럼 풍부한 지식과 눈높이 그리고 열광할 준비가 된 엄청난 세대가 존재함에도 전근대적인 K리그 문화와 애국심 온리 마케팅으로 이 시장을 다 놓쳐버린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축구도 모르면서 16강만 염원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박지성 선수도 “모든 축구인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박지성, 안정환, 이영표 같은 40대들이 방송에서 일회적이고 추상적으로 한국 축구의 변화를 촉구하고 만다면 다소 공허하다. 이 선수들은 몸속에 선진 축구의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된 이들이다. 아마 휴대폰을 압수하면 전 세계 축구인과 다 연결될 거다(웃음). 이런 막대한 자원들이 축구협회 외부에 있거나 회의 몇 번 하는 정도의 자문 역할에 그친다면 큰 손실이다. 어떤 식으로든 협회와 연맹 안으로 들어가서 더 책임 있는 실무자 역할을 해야 한다. 어느 조직이나 40대가 핵심 아닌가. 또 협회가 바뀌어야 하지만 단순한 인적 청산이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건 방향과 속도다. 세계 축구계의 전술적 흐름, 팬들의 감수성, 미디어 플랫폼과 마케팅의 조건 변화까지를 실질적인 업무로 삼아야 한다. 16강이 아니라 이것이 한국 축구의 목표다.”
이번 월드컵에선 일본 축구의 선전이 눈에 띈다.
“일본도 한때 대표팀이 주춤하고, 경제 위기가 오면서 J리그가 위태로워졌다. 이때 J리그는 차라리 다 망하자며 제로 베이스에서 과감한 개혁을 했다. 구단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선수들에게도 팬의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선수들이 지역 주민과 적극적으로 일상생활을 나눴고, 팬들이 ‘동네 젊은 친구들’ 경기 보러 경기장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그렇게 5년이 걸렸고, J리그가 다시 활성화됐다. 중요한 건 그저 축구에 대한 사랑, 애국심이 아니라 이처럼 문화를 산업으로 만들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다.”
1승의 감격이 크지만 1, 2차전을 보면서 ‘4년만의 희망고문’을 멈추고 싶다는 얘기도 많았다. 한국 축구 희망이 있나.
“하드웨어는 충분하다. 아마추어들도 잔디구장에서 뛰고, 축구협회의 1년 예산도 수년째 1000억에 육박한다. 해외 파견 프로그램을 통해 선수 자원의 기량도 향상됐고, 팬덤도 충분하다. 문제는 16강을 가느냐, 1승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인상적인 한두 경기를 하는 것을 넘어서 협회와 연맹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대표팀을 리빌딩하고, 합리적인 계획에 따라 한국 축구의 실력을 차근차근 올려가는 자생적 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악바리 정신’ ‘우리는 하나’라는 전근대적 구호가 아니라 과학적인 전술과 체계적인 관리라는 시스템이 시급하다. 그렇게 근대의 문턱을 넘을 때 비로소 문화적 열광의 새 지평이 열린다.”

정윤수 평론가는 …

1968년생.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다. 축구광 출신에, 인문학적 통찰에 기반한 축구비평으로 필명이 높다. 한국 축구 문화를 구성하는 세 요소로 ‘단순함과 오묘함이 결합된 장르 자체의 매혹, 국가주의적 동원, 시민의 열정’을 꼽는다. 현 K리그 발전위원회 위원. 저서로 『축구장을 보호하라』 『스포츠 인권을 만나다』 등이 있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