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부터 해야겠다. 믿음이 부족했다. 독일전을 앞두고 ‘벼랑 끝에 몰린 축구대표팀을 격려하고 응원하면 결과로 보답할 것’이라고 글과 말로 수 차례 반복했지만, 마음 속 한 켠에서는 불안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 월드컵에 함께 참가한 아시아 라이벌 이란ㆍ일본과 견줘 현저히 떨어지는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위기 상황에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한국인 특유의 저력은 막바지에 접어든 월드컵 조별리그 경쟁 구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독일전 2-0승. 지금은 결과를 알고 있으니 고개를 끄덕이지만, 킥오프 직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스코어다. 기가 막히게 맞힌다는 유럽의 베팅사이트조차도 ‘한국이 독일에 2-0으로 이길 확률보다 0-7로 대패할 확률이 더 높다’고 단언하지 않았나. 독일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이자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힌 나라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존재다. 독일전의 감흥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자 2-0으로 승리하고도 16강행 티켓을 가져오지 못한 아쉬움이 점점 커진다. 독일이 월드컵 본선에서 결선 토너먼트에 오르지 못한 건 첫 선을 보인 1938년 이후 80년 만에 처음이라는데, 조별리그에서 독일을 꺾고도 16강에 올라가지 못한 나라는 몇 팀이나 될 지 문득 궁금해진다.
돌이켜보면 신태용호는 4가지가 부족했다.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건 심리치료 전문가의 부재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에서 1무2패로 탈락한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백서’를 발간했다. 선수와 지원스태프, 협회 관계자, 취재기자 등 브라질 월드컵 본선 도전 과정을 함께 한 전문가 47인의 의견을 종합해 만든, 이른바 ‘본선 생존 지침서’다. 당시 백서는 “스포츠 심리 전문가를 고용해 지속적인 상담으로 선수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태용호에 심리 전문가는 없었다. 수비수 장현수(FC 도쿄), 김민우(상주),김신욱(전북) 등 경기 중 눈에 띄는 실수를 저질렀거나 부진했던 선수들이 악플러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 자신감을 잃었다. 러시아 월드컵 본선 세 경기를 치르며 신태용호는 심리적인 위축이 경기력에 미치는 악영향이 신체적인 부상 못지 않게 심각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4년 전 홍명보호가 가슴 깊이 새긴 교훈과 동일하다.
경기력 관리 프로그램 효율이 기대 이하였던 점도 아쉽다. 러시아 입성에 앞서 오스트리아에서 실시한 전지훈련 기간 중 신태용 감독은 “서로 다른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체력 수준을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 파워프로그램을 세 차례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공포의 삑삑이’로 불리는 ‘셔틀런(shuttle run)’을 비롯해 체력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고강도 훈련이 한 차례 진행됐다.
거기까지였다. 나머지 두 번의 훈련은 끝내 진행되지 못했다. 선수들의 체력 상태가 들쭉날쭉해 일부 선수들이 훈련 참가 후 앓아눕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시 파워프로그램 실시 여부를 놓고 코칭스태프가 국내파와 해외파로 나뉘어 대립각을 세웠다는 후일담도 들린다. 선수들의 체력을 정확히 측정하는 시스템도, 그에 맞게 훈련 일정을 마련하는 시스템도 ‘오류’ 신호를 보냈다.
베이스캠프 활용법 또한 미흡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베이스캠프로 선정하며 “조별리그 경기를 치를 세 곳의 도시(니즈니노브고로드ㆍ로스토프나도누ㆍ카잔) 이동 및 환경 적응 편의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실상은 달랐다. 낮 최고 기온이 섭씨 20도 안팎에 머물러 서늘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달리 2차전 장소 로스토프나도누는 낮 최고 기온이 35도에 육박할 정도로 무더웠다. 3차전 장소 카잔은 더울 뿐만 아니라 습도도 높아 후텁지근했다. 선수들은 경기 준비와 함께 ‘날씨 적응’이라는 예상 밖 부담을 추가로 짊어져야 했다.
마지막으로 ‘신태용호의 색깔’이라 부를 만한 전술적 특징이 드러나지 않은 점도 아쉽다. 한국은 조별리그 세 경기를 치르는 동안 매번 포메이션과 선수 구성을 바꿨다.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함께 도전한 이란, 일본, 호주 등 아시아의 라이벌들이 어떤 팀과 만나도 자신들만의 전술적 색채를 유지한 것과 비교된다. 이란은 스페인을 만났을 때도, 포르투갈을 만났을 때도 특유의 ‘늪 축구’로 경쟁했다.
‘아시아의 호랑이’가 월드컵 무대에서 세상을 놀라게 하려면 좀 더 전문적이어야 한다. 좀 더 치밀해야한다. 좀 더 또렷해야한다. ‘월드컵 16강’은 오직 준비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훈장이다.
<카잔에서>
축구팀장 mil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