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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뭐예요?] 미술관장 되고 와인 만들고…칼퇴 부르는 매력, 보드게임의 세계

중앙일보

입력

“취미가 뭐예요?” 상대방을 좀 더 알고 싶을 때 흔히 던지는 질문이지만 의외로 답은 어렵다. ‘나’를 표현하는 키워드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보기’ ‘음악 감상’ ‘독서’로 대표되는 국민 취미 3대장 외에 최근에는 ‘맛집 탐방’ 정도가 추가됐을 뿐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요즘, 취미는 여가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다들 어떤 방법으로 각자의 워라밸을 지키고 있을까. 특별할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의 조금 특별한 취미생활들을 소개한다.

보드게임 동호회 '보관함'의 회원들이 방탈출 게임 '언락'을 하고 있다.

보드게임 동호회 '보관함'의 회원들이 방탈출 게임 '언락'을 하고 있다.

 지난 21일 목요일 오후 7시,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이른 저녁 시간. 관악구 봉천동의 한 카페에서 젊은 남성 2명이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그림 카드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다. 카드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빨간 글씨로 쓰인 숫자들이 빠르게 줄어든다. 초 단위로 깎이는 시간이다. 이 숫자가 ‘00:00’이 되기 전에 카드를 조합하고 암호를 풀어 스마트폰 앱에 알맞게 입력해야 한다. 테이블 위에서 하는 ‘방탈출 게임’이다.

테이블 위의 방탈출 게임 '언락'은 그림 카드와 함께 스마트폰 어플을 활용한다.

테이블 위의 방탈출 게임 '언락'은 그림 카드와 함께 스마트폰 어플을 활용한다.

방탈출 게임에 열중한 이들은 관악구 기반 보드게임 동호회 ‘보관함’의 회원들이다. 이날은 시간이 되는 회원들끼리 ‘급’ 만나는 벙개 모임이 열린 날이다. 남성 회원 5명과 여성 회원 1명이 참석했다. 평일 저녁임에도 다들 보드게임을 하기 위해 퇴근 후 부지런히 약속 장소를 찾았다. 이와 같은 벙개 모임이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1~2회, 많을 땐 매일도 열린다. 퇴근 후 2~3시간이라도 게임을 하고 싶은 열정을 가진 이들이 꾸준히 모임을 열고 있다.

21일 봉천동 카페 '일피노'에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 '보관함' 회원들. 이와 같은 벙개 모임이 일주일에 1~2회는 열릴 정도로 활동이 활발하다.

21일 봉천동 카페 '일피노'에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 '보관함' 회원들. 이와 같은 벙개 모임이 일주일에 1~2회는 열릴 정도로 활동이 활발하다.

‘평일 저녁에 시간을 내서 보드게임을 한다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보드게임은 2000년대 초반 크게 유행했다가 한순간에 사그라진 놀이문화다. 한때 ‘브루마블’·‘할리갈리’·‘젠가’ 등 유명 보드게임을 앞세운 보드게임방이 우후죽순 생겨나, 번화한 동네라면 어디든 보드게임방이 있었다. 교복 입은 학생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데이트하는 커플을 가리지 않고 보드게임방으로 몰려 들었다. 그러나 열풍이 한 풀 꺾인 이후, 그 많던 보드게임방들이 빠르게 문을 닫았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보드게임방도 ‘핫플레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녀노소 모두의 놀이방에서 ‘올 사람만 오는’ 장소가 됐다. 보드게임을 위해 평일 저녁을 바치는 열정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보관함' 회원의 집 안에 마련된 보드게임 컬렉션. [사진 강태수]

'보관함' 회원의 집 안에 마련된 보드게임 컬렉션. [사진 강태수]

‘보관함’의 회장 강태수씨는 “대중적인 인기가 떨어졌을 뿐, 매니어층은 과거에 비해 더 두터워졌다”고 말한다. 국내 보드게임 매니어들은 ‘보드라이프(boardlife.co.kr)’,  ‘다이브다이스(divedice.com)’ 등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결집한다. 그들은 대중화한 보드게임방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고도의 전략게임이나 한국에 정식 발매되지 않은 해외의 보드게임 등을 동호회나 소규모 모임을 통해 즐기기 시작했다. 보드게임을 구매하기 위해 일본이나 유럽 등 현지를 방문하기도 하고, 해외 게임의 한국어 번역판 출간을 위한 크라우드펀딩도 활발하다. ‘보관함’뿐 아니라 각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동호회가 운영되고 있다.

강씨가 동호회를 처음 만든 건 3년 전이다. tvN ‘더 지니어스’, JTBC ‘크라임씬’과 같은 두뇌 게임 리얼리티쇼의 인기로 보드게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올라오던 시기였다.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경험했던 보드게임의 재미를 잊을 수 없어 모임을 꾸렸다. 평일 퇴근 후 집 근처에서 편하게 보드게임을 즐길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보관함’은 보드게임과 관악구의 앞글자를 딴 이름이다. 현재 회원은 총 40여명, 3년간 모임을 거쳐간 인원은 15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월 1회 정기모임 외에도 수시로 이와 같은 벙개 모임을 열어 보드게임을 즐긴다.

'보관함' 회장 강태수씨가 모임에 가져온 보드게임을 설명하고 있다.

'보관함' 회장 강태수씨가 모임에 가져온 보드게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날 테이블 위에는 방탈출 게임 카드 외에도 각자 가져온 보드게임 상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한 게임에 20~30분인 가벼운 추리 게임부터 복잡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가진 전략게임까지, 종류는 다양하다. 마피아 게임과 스무고개 퀴즈 게임을 접목시킨 ‘인사이더’는 빠르면 20분 안에도 한 판이 끝나지만, 포루투갈의 유명 디자이너(보드게임의 스토리를 짜고 실제 게임으로 구현해내는 사람) 비딸 라세르다의 전략 게임 ‘갤러리스트’는  게임 시작을 위해 세팅하는 데에만 30분 가까이 걸린다. 각 플레이어가 미술관 운영자가 되어, 화가를 키워 명성을 쌓고 작품의 가치를 올려 판매한 뒤 벌어들인 돈으로 최종 승자를 가리는 게임이다.

포도농장 운영자가 되어 와인을 판매하는 전략게임 '비티컬처'.

포도농장 운영자가 되어 와인을 판매하는 전략게임 '비티컬처'.

'비티컬처'의 게임판. '일꾼' 또는 '농부'를 뜻하는 색색깔의 말을 이동시켜가며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든다.

'비티컬처'의 게임판. '일꾼' 또는 '농부'를 뜻하는 색색깔의 말을 이동시켜가며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든다.

회원들은 이날의 게임으로 ‘비티컬처’를 선택했다. 농장에서 포도를 키워 와인을 수확하고 그 와인을 판매해 돈을 모으는 전략 게임이다. ‘갤러리스트’나 ‘비티컬처’처럼 스토리와 배경이 확실한 게임은 구성품의 디자인도 컨셉에 맞춰 꼼꼼하게 만들어진다. ‘갤러리스트’에는 미술관에 전시할 작가들의 그림 카드를 올려두는 미니어처 이젤이 함께 들어있다. 비티컬처는 프랑스 시골의 포도 농장을 연상시키는 지도를 펼쳐두고 진행한다. 소요시간은 2~3시간을 훌쩍 넘긴다. 그동안 게임을 함께 하는 멤버들 사이에는 수많은 대화가 오간다.
강씨는 “플레이어들이 직접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보드게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모바일 게임 기획자로 일하는 강씨는 모바일이나 온라인 게임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얼굴을 안 보고 게임을 하다 보면 잘 안 풀릴 때 막말이 나오기도 하고 욕설이 오가다 싸움으로 번질 때도 많아요. 오프라인에서는 그런 상황은 거의 벌어지지 않죠.” 상대방의 말투와 표정을 통해 기분을 살피고, 농담을 해서 서로 웃기거나 속여가며 촘촘한 심리전을 하는 재미는 온라인 게임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다. 보드게임에 한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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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이 취미로 보드게임을 한다고 하면 비틀어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도박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들은 회원도 있었다고 한다. 강씨는 “온라인 게임에서는 ‘보드게임’이라고 하면 슬롯머신이나 카지노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같은 시각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윷놀이·바둑·장기도 일종의 보드게임이다. 보드게임은 유행과 상관 없이 늘 우리 곁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독일에서 매년 열리는 보드게임 박람회에 가면, 할아버지들도 요즘 우리가 하는 최신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어요. 남녀노소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건전한 취미생활이라는 인식이 보다 널리 퍼졌으면 좋겠어요.”

글=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사진·영상=전유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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