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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호의 이나불] 조폭·건달만 사투리 … DJ “모래시계 PD 용서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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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대한민국을 일컬어 흔히 ‘서울 공화국’이라고 한다. 경제·정치·문화 등 대부분의 사회적 역량이 서울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현상을 나타낸 말이다. 지역 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에도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란 옛말처럼 깊고 오랜 서울 사랑은 쉬이 무뎌지지 않는다. 이러한 서울 중심의 사고는 대중문화에도 이어진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사고가 굳어지는 데 앞장 서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안방극장 ‘지방비하’ 지금도 여전 #서울 엘리트, 지방 무뢰한 이분법 #TV 속 수많은 드라마에서 되풀이 #“충주에는 산부인과 없다” 억지도 #‘한국은 서울공화국’ 편견 극대화

드라마 ‘나도 엄마야’. 충주를 아기 낳을 산부인과가 드문 시골처럼 묘사했다. [사진 SBS]

드라마 ‘나도 엄마야’. 충주를 아기 낳을 산부인과가 드문 시골처럼 묘사했다. [사진 SBS]

지난 20일 SBS의 아침 드라마 ‘나도 엄마야’는 충주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충주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제목에서 엿보이듯 ‘나도 엄마야’는 한 대리모가 아이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겪는 갈등을 담은 얘기. 이날 방송에서는 대리모가 아이를 출산하는 내용이 그려졌는데, 충북 충주를 애 낳을 곳 하나 없는 시골로 묘사했다. 산통이 시작된 대리모는 친정 엄마와 함께 ‘충주’라고 크게 적힌 택시에 탄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산부인과는 없다. 1시간 넘게 달린 끝에 겨우 찾은 산부인과에서는 ‘아이를 받지 않는다’며 당황해한다. 이후 3~4곳의 산부인과를 겨우 찾아 들르지만 역시 애를 받는 곳은 없다. 이 급한 와중에도 ‘충주’ 택시 기사는 급한 기색이 없다. “빨리 가달라”는 요구에 느린 말투로 “아 가고 있잖유. 그렇게 급하시면 어제 오시지 그랬슈”하고 답한다. 대리모는 결국 택시 안에서 아이를 낳는다.

곧장 시청자들 사이에선 “충주를 비하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 산부인과도 많고 나도 여기서 출산했다. 충주 토박이로서 화가 난다(별***)”, “이건 진짜 충청도 비하 같다. 충청도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실제로 저렇느냐(비***)”, “충주 시장과 충주 산부인과 의사들은 작가 고소해야 한다, 저런 비하가 어디 있느냐(돼***)”는 비판이 잇따랐다. 출산율이 점점 더 떨어지면서 산부인과 수도 줄고 있지만 이처럼 과장된 연출을 도시 이름까지 거론해가면서 묘사해야 했을까.

대중문화에서 비(非) 서울 지역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건 하루 이틀된 일이 아니다. 1995년 인기 드라마였던 ‘모래시계’에선 같은 전라도 출신임에도 비열한 인물들만 지역 사투리를 썼다. 이를 본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모래시계’를 만든 감독·피디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새벽:김대중 평전』). 2010년 전남도는 한국방송작가협회에 “사투리는 지역의 넋이 밴 정서·문화이자 뼈와 살인데도 요즘 영화·드라마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비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며 공문까지 보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투리 쓰는 이들의 극 중 역할을 보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투리 쓰는 이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무시 받는 직업을 갖거나, 무지해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교도소가 주무대였던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전국의 온갖 범죄자들이 등장하는데, 사투리를 쓰는 이들은 대부분 ‘깡패’로 설정됐다. [사진 tvN]

교도소가 주무대였던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전국의 온갖 범죄자들이 등장하는데, 사투리를 쓰는 이들은 대부분 ‘깡패’로 설정됐다. [사진 tvN]

올해 초 종영한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이하 슬감빵)’을 보자. ‘슬감빵’은 야구선수 김제혁이 교도소에 가게 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그린 드라마다. ‘교도소’ 특성상 전국의 온갖 범죄자가 등장했는데, 유독 ‘깡패’들은 지역 출신으로 설정됐다. 살인 혐의로 20여년을 복역 중인 장기수(최무성 분)는 부산 출신 깡패다. 김제혁을 괴롭히는 오성파 행동대장 갈매기(이호철 분) 또한 인천 출신 깡패다. 이에 반해 서울 출신 재소자들은 명문대 출신 마약범이거나, 잡범이라도 ‘문래동 카이스트’라 불리며 잡지식을 뽐냈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를 봐도 비슷하다. SBS 월화 ‘기름진 멜로’의 오맹달·전이만(조폭 출신 요리사), 이미숙(껌 파는 할머니), KBS 월화 ‘너도 인간이니?’의 로보캅·조인태(체육관 운동선수), tvN ‘무법 변호사’의 안오주(조폭 출신 기업인·시장), 최대웅(조폭), MBC 수목 ‘이리와 안아줘’의 채소진(헤어샾 보조) 등. 극 중 채소진의 오빠 채도진(장기용 분)은 경찰대를 나온 엘리트로, 1회에서 부산 사투리를 쓰며 등장했지만 어느 순간 사투리 대신 서울 말을 쓰고 있다.

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작동 방식이 유사하다. 원래 서구의 예술 사조에서 드러난 동양적 가치를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세계적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 새롭게 정의한 이후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동양을 바라보는 일방적인 인식 체계’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됐다. 쉽게 말해 ‘동양은 이럴 것’이라며 자기식대로 규정하는 것을 말한다. ‘오리엔탈리즘’ 하에서 서구는 동양을 자신과 같이 일상을 영위하는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방식 자체도 폭력적인데, 이는 무지·편견에 기인한 차별로 이어지며 폭력성을 드러낸다.

오리엔탈리즘의 서구를 ‘서울’로, 동양을 ‘비 서울 지역’으로 치환해보자. 방송법은 방송의 공적 책임을 강조하며 “지역·세대·계층·성별간 갈등을 조장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다. 지금의 방송은 오히려 잘못된 인식을 확대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노진호의 이나불]

누군가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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