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집 근처 다리에, 공원에 남은 흔적이 전한다…6·25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

중앙일보

입력

이유연 학생기자가 한강대교 남단에서 한국전쟁 당시 한강대교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봤다.

이유연 학생기자가 한강대교 남단에서 한국전쟁 당시 한강대교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봤다.

오늘은 6·25전쟁(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8년째 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며 우리나라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상흔(상처를 입은 흔적)을 남겼어요.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잠시 멈춘 상태, 즉 ‘휴전’ 중입니다. 전쟁의 아픔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역사를 잘 알고 기억할 필요가 있겠죠. 이번 주말에는 6·25전쟁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아가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먼저 다녀온 소중 학생기자단의 탐방기를 소개합니다.

정리=최은혜 기자 choi.eunhye1@joongang.co.kr, 글·사진=김하솔(대구 도남초 6)·박나연(광주 천곡중 1)·이서연(인천 공항중 2)·이유연(서울 행당초 5)·채유진(대구 신암초 6) 학생기자, 사진=송휘성(오픈스튜디오), 자료=전쟁기념관·독립기념관

▲서울

1.전쟁기념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9

2.한강대교
서울 용산구 이촌동

이유연(서울 행당초 5)
한국전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지난 12일 전쟁기념관에 갔습니다. 박병호 서울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이 6·25전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죠. 먼저 전시실 입구에 걸려 있는 한반도 지도를 보며 6·25전쟁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쟁이 시작되고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에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고개를 통해 넘어오자, 북한군 탱크가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켰대요. 이때 다리를 건너던 800여 명의 피난민들도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6·25전쟁실’이라고 이름 붙은 2개의 전시실에는 전쟁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모형이나 사진, 유물 같은 것들이 전시돼 있어서 실감 났어요. ‘융단폭격(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대규모 폭격)’, ‘인해전술(무기나 전술보다 많은 수의 인력으로 적을 압도하는 전략)’처럼 전쟁에서 비롯된 말도 알게 됐고요.

저는 아직 5학년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따로 역사를 배우지 않았어요.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남침을 했다는 것,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이 흥남 철수 작전을 겪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죠. 한국전쟁이 오직 남한과 북한의 문제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이 전쟁에서 우리나라는 21개국이 참여한 유엔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수 있게 도와준 21개 나라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쟁기념관 전시실을 모두 둘러본 후에는 한강대교를 찾아갔어요. 전쟁 때 폭파되었던 한강대교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많은 차들이 다니는 튼튼한 다리의 모습이에요. 당시 폭파로 인해 많은 피난민들이 희생됐다는 점이 안타까웠어요. 전쟁은 통일이라는 선물조차 남기지 않았어요. 많은 희생과 이산가족의 아픔만 남겼죠. 만약 내가 이산가족이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하루 빨리 통일이 돼서, 우리에게 상처만 남긴 역사가 얼른 치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덕수궁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은 6·25전쟁 때 미군의 포격으로 없어질 뻔한 적이 있는데요. 미군이 인천 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을 밀어붙여 서울로 진격하던 중이었죠.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들자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포격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며 고민했고, 결국 포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4.숭례문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은 6·25전쟁 때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박격포를 맞아 화재 피해를 입었어요. 1961~63년 사이 해체 보수가 이뤄져 원래를 모습을 찾았지만 2008년 2월 화재로 다시 훼손됐죠. 이후 5년에 걸친 복원 작업으로 지금은 예전 모습을 거의 되찾았습니다.

▲경기도

1.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설마리 전투는 1951년 4월에 감악산 기슭인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해요.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 제1대대 5700여 명이 중공군 3만여 명에 맞서 싸운 전투로, ‘글로스터 고지 전투(Battle of Gloster Hill)’라고도 불러요. 3일 동안 치른 이 전투로 영국군은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2.감악산 결사대 사당·현충탑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산 54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파주지역 반공 애국 청장년들과 미처 후퇴하지 못한 국군 장병 일부 등 500여 명은 감악산에 은신했습니다. 이들은 감악산 결사대를 조직하고, 태극기를 그려 구국투쟁에 목숨을 바칠 것을 혈서로 맹세했어요. 이후 아군이 북으로 진격할 때까지 결사대 대원들은 북한군에 저항하며 활약했고 그 과정에서 희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3.노르웨이군 전시 병원
경기도 동두천시 하봉암로 27

노르웨이군은 6·25전쟁 동안 주로 해상 물자 운송과 의료 인력, 적십자 지원금, 의류 등을 지원했어요. 그중 노르웨이군 이동외과병원 제1대대가 동두천에 배치됐죠. 노르웨이군 전시 병원은 1951년부터 3년 4개월 동안 다친 장병들을 치료하는 데 힘썼고 상당수의 민간인들도 치료했습니다. 당시 병원 건물이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어요.

▲인천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
인천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 산 81

이서연(인천 공항중 2)
얼마 전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어요. 본래 한 민족이었던 우리가 정상회담을 통해서야 겨우 교류를 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뭘까요. 저는 6·25전쟁에 대해 알기 위해 강화도에 있는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방문했어요.

기념공원은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어요. 해안가를 두른 철조망은 분단의 현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죠. 그 모습을 보면 참 씁쓸해요. 입구에는 군복을 입은 헌병의 모형이 서 있어요. 내부로 들어가면 2층 보초대가 눈에 띄어요. 보초대에 올라가면 기념공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답니다. 공원을 감싸며 늘어서 있는 철조망에는 사진자료들이 길게 나열돼 있어요. 설명을 읽고 사진을 보니 더욱 와 닿았어요.

사진자료들을 따라 걷다 보면 한반도의 모양을 한 조형물이 보이는데요, 하나가 된 한반도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긴 듯해요. 그 옆에는 6·25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어요. 강화도 출신 전우들의 뜻을 모아,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했다고 해요. 옆에 기념비에 대한 설명도 있으니 읽어보세요. 기념비 맞은편에는 참전국들의 국기와 함께 지원 내용을 볼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의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평화전망대에도 한 번 가보고 싶어져요. 북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날도 어서 오면 좋겠네요.

지금 우리는 ‘제2의 남북국 시대’라는 말도 있어요. 우리 선조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나라를 분단된 채로 후손에게 물려준 건가요? 우리 모두 6·25와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함께 막았으면 좋겠어요. 6월 25일이 다가옵니다. 가까운 기념관을 찾아 6·25에 대해 더 공부하고,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 좋겠어요. 가기 전에 6·25에 대한 글을 읽고 공부도 하면 더욱 좋겠죠.

▲광주

산동교 전투지
광주광역시 북구 동림동 122-4 일대

박나연(광주 천곡중 1)
광주의 6·25전쟁 전적지로는 산동교 전투지가 있습니다. 옛 산동교는 길이 228m의 다리인데 이곳에서 북한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다고 해요. 북한군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광주까지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국군은 옛 산동교를 폭파했어요. 산동교 전투에서 군경 합동부대는 1시간 동안 북한군을 저지했지만 결국 화력에 밀려 광주 방어에 실패하고 말았죠. 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시민들이 피난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산동교 주변에는 아파트 단지가 있고 야구·축구 등을 할 수 있는 공원으로 바뀌었어요. 평소 시내에 갈 때 산동교 옆을 지나갔는데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아쉬웠죠. 이번에 찾아갔을 때 산동교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과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다리 옆에는 6·25전쟁 당시 산동교의 상황 등을 설명한 표지판이 보였고요. 입구에는 ‘구산동교’라고 적혀 있었어요. 영산강에서 본 동림동의 전경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주는 사진과 산동교 공사 이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들의 색이 바랜 걸 보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았어요. 산동교에서 보이는 영산강의 물이 맑지 않아서 그 점도 아쉬웠죠.

학교에서 6·25전쟁에 대해 배울 땐 잘 이해도 안 되고 의미를 몰랐지만, 이번 탐방을 통해 당시 상황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오래된 사건일수록 잊기 쉬운데 저는 앞으로도 6·25전쟁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저도 잘 몰랐던 산동교지만 사람들이 많이 기억해줬으면 해요.

▲강원

백마고지 전적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산 215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했던 백마고지(395고지)는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중공군과 국군이 이곳을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였죠. 열흘 동안 이어졌던 치열한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은 승리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백마고지역으로 여행하는 DMZ 트레인을 타보는 것도 좋겠죠. 코레일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답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 유엔 평화로 96
1951년 유엔군 사령부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 전사자의 묘지를 부산에 설치했습니다. 1955년 유엔총회에서는 이 묘역을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결의했어요. 세계에 하나뿐인 유엔군 묘역이죠. 공원 내에 있는 추모관은 한국의 유명한 건축가 김중업씨가 설계했어요. 6개의 노출된 들보와 기하학적인 삼각형태가 특징입니다.

▲경남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경남 거제시 고현동 362

채유진(대구 신암초 6)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6·25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포로수용소의 일부만 남아 있던 이곳에 포로들의 생활상·막사·사진·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유적공원을 만들었어요.

유엔군은 거제시 신현읍·연초면·남부면 일대 1200만㎡ 부지에 포로수용소를 지었는데요. 1951년 북한군 15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17만여 명의 포로가 이곳에 수용됐다고 해요. 1953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2만7000여 명이 수용소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전쟁존·포로존·복원존·평화존 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쟁존의 탱크전시관은 북한군의 남침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 모형 속에서 6·25전쟁 및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에요. 모형임에도 정말 멋진 탱크가 실제로는 어떨지 궁금했어요. 디오라마관에는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생활상·폭동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돼 있었어요. 특히 몇 군데에서는 소리도 나서 더욱 생생함이 더해졌죠.

6·25역사관에서는 전쟁 발발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요. 또 커다란 대동강철교 모형이 있는데,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하게 된 피난민들이 폭파된 대동강철교를 타고 건너며 필사적인 피난길에 올랐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포로생활관에서는 포로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당시의 사진과 모형, 영상자료를 통해 엿볼 수 있었어요.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에 투항하는 북한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된 포로생포관, 포로수용소의 막사와 감시초소, 취사장, 생활도구까지 재현된 야외막사도 둘러봤어요. 무기전시장에는 M577 장갑차, M46 전차, UH-1 헬기, 2.5톤 카고 등 군수품이 전시돼 있는데, 모두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니 슬펐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영원한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경북

다부동 전적기념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구로 1486

김하솔(대구 도남초 6)
“한 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이 있을 것이니 끝까지 싸워야 한다.” 다부동 전투는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는, 마지막 방어선을 지킨 전투였어요. 국군의 계속된 전투 패배로 국토의 90%가 북한군에 점령당했고, 대구와 부산에 피난민들이 몰려와 있는 상황이었죠. 다부동을 북한군에 내주게 되면 대구가 사정권 안에 들게 되고,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거였어요.

군인들은 ‘후퇴하지 말라’는 명령에 죽음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습니다. 미군은 몰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낙동강 유역에 B-29 폭격기로 총 960톤의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이후 몇 년 동안 풀이 못 자랄 정도였대요. 또 이 전투에서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학도병과 12~13세 정도인 소년병들, 또 군번 없는 용사들의 희생이 많았다고 해요. 지금까지 이분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이분들의 넋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는 매년 유해발굴을 계속하고 있는데요. 이곳에는 259점의 유해가 합장돼 있는 무명용사의 묘가 있습니다. 또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각비와 사진으로만 보던 구국용사 충혼비, 구국경찰 충혼비 등을 볼 수 있었어요. 비석 앞에는 많은 국화꽃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다시 이곳을 찾아 국화꽃을 놓고 묵념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번에 다부동 전투에 대해 알아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기쁘기도 했습니다. 전투가 있던 때부터 전적기념관이 생기기까지 너무 많은 아픔이 있었던 것 같아요. 참전용사였던 분들이 지금은 나이가 아주 많으실 텐데, 그분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더 많은 유해가 발굴되고 공적에 대한 예우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로우틴을 위한 신문 ‘소년중앙 weekly’
구독신청 02-2108-3441
소년중앙 PDF 보기 goo.gl/I2HLMq
온라인 소년중앙 sojoong.joins.com
소년중앙 유튜브 채널 goo.gl/wIQcM4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