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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JP “호남 정권 잡게해 한 풀어줘야, 박정희 빚 갚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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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66년 6월 8일 대전 유성만년장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조찬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6년 6월 8일 대전 유성만년장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조찬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5·16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해 일흔여덟까지 43년 공적 생활을 했다. 그 공적 생활은 우리 현대사의 공과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2004년 정계를 은퇴하고 지난 6·13 지방선거까지 나라의 원로로서 JP의 경륜과 지혜는 빛났다.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은 70년 한국 현대사의 서사였다. JP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과거의 존재였던 적이 없다. 언제나 현재의 인물이었다.

일본 외환보유액 14억 달러일 때 #배상금 8억 달러 따내 산업화 밑천 #3선 개헌 반대로 박정희와 갈등 #“제가 나세르입니까” 처음 대들어 #기자가 영면 사흘 전 JP 자택 찾아 #미리 쓴 부음기사 들려주자 눈물

JP 인생에서 무엇보다 드라마틱했던 무대는 5·16이다. 육사 8기(1949년 입학)생. 소장 혁신 장교 그룹의 리더가 JP였다.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옹립해 3600명의 군인으로 정변에 성공했다. 총격전은 있었으나 사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은 세계사의 드문 정변이었다. 그는 “혁명은 숫자가 아니라 의지”라고 했다.

육군사관학교 8기생 졸업앨범. [중앙포토]

육군사관학교 8기생 졸업앨범.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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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에서 JP의 업적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것이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80년 1645달러 → 2000년 1만841달러로 증가했다. 1960~80년대 산업화의 성공은 도시에 탄탄한 중산층 세력을 성립시켰다. 도시의 중산계층은 한국 정치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이끈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은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김종필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빵을 먹고 자란다”고 말한다.

현실적 힘에 바탕한 실용주의 노선은 JP 철학의 핵심이다. JP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광복 20년 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타결 짓는 과정에서 JP는 가장 어려운 배상금 문제를 맡았다.

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2월 장충동 공관에서 열린 파티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대화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중앙포토]

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2월 장충동 공관에서 열린 파티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대화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중앙포토]

62년 가을이었다. 배상금 혹은 대일 식민지 청구권 규모는 처음 5000만 달러를 제시한 오히라 일본 외상과 일진일퇴 끝에 6억 달러로 낙착됐다(65년 협정 서명 때 8억 달러로 상향).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이 14억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성공한 협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야당과 재야 세력은 그를 “제2의 이완용”이라고 규탄했다. 김종필은 “조국 근대화의 밑천을 장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매국노 소리를 들어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술회했다.

식민지 배상금은 박태준의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정주영의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 등 한국 산업화의 뼈대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식민지 배상금을 소비재가 아닌 국가 인프라 건설에 집중 투입한 전략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규모의 배상금을 국민 개인에게 나눠 주거나 권력자끼리 나눠 먹은 동남아시아 다른 신생국들과 비교됐다. 김종필은 60년대 말 집권당인 공화당 의장, 71~75년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박정희의 근대화·자주국방·중화학공업 정책을 충실하게 지원했다.

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대일 청구권 자금 협상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대일 청구권 자금 협상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JP의 2인자 정치는 파란과 견제, 고뇌와 보람으로 굴곡졌다. 김형욱·이후락 같은 중앙정보부장이나 박정희의 고향인 TK(대구·경북) 정치세력이 충남 출신(부여)인 그를 이중삼중으로 에워쌌다. 60년대 말 3선개헌을 반대하는 JP에 대한 감시가 가택연금 수준으로 격상되자 김종필은 청와대로 짓쳐 올라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에게 대들었다. 이집트 혁명 때 나기브 장군을 모시고 반란에 성공한 나세르가 뒤에 나기브 대통령을 배신한 사례를 제시하며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라고 박정희를 몰아붙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내가 가까이 있으면 거북해하고 없으면 아쉬워 했어.” 김종필은 말년에 들어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 뒀던 처삼촌 박정희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다. “권력은 더러운 것. 환멸을 느꼈지. 그런데 권력은 그런 것이기도 해.”

87년 김영삼(YS)·김대중(DJ)과 함께 연 3김정치는 노무현 대통령 시대까지 15년 가량 지속된다. 그렇지만 JP는 다른 2김과 달리 권력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정치 일생은 2인자의 노회한 처세술로 점철됐다거나 기회주의 행태, 대세 추종주의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렇듯 평점이야 어떻든 JP의 선택은 전인미답, 역사의 새 장을 열곤 했다.

90년 3당합당만 해도 영남+충청의 기득권 정치연합이 호남 세력을 포위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이 많다. 그러나 JP는 “공산주의 소련이 붕괴하는 급격한 냉전 해체의 시기에 북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정치적 안정이 필요했다”고 반박한다. 3당 합당 시기에 이뤄진 한·소(90년), 한·중(92년) 수교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91년)은 동아시아 지정학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국무 총리 시절인 70년대 초 부인 박영옥 여사와 함께 지프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모습. [중앙포토]

국무 총리 시절인 70년대 초 부인 박영옥 여사와 함께 지프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모습. [중앙포토]

김종필 현역 시절의 마지막 드라마는 DJP 공동정권이다. 97년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JP는 이회창을 버리고 김대중의 손을 잡았다. 호남+충청 지역연합이 영남 정치세력을 야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보수세력에서 JP 변절자론이 쏟아졌다.

당시 JP한테 보수 인사들이 ‘색깔이 다른 DJ를 왜 밀어 주느냐’고 따졌다. 김종필은 “우리가 언젠가 남북통일을 해야 하는데 동서가 갈라져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호남이 정권을 잡게 해 수십 년 묵은 한을 풀어 줘야 한다”고 설득했다. 신당동 자택을 심야에 찾아와 도움을 호소한 DJ에겐 “박정희 대통령이 진 빚을 갚아 드리겠다”고 했다.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해졌어도 보조 장치를 달고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는 김종필 전 총리. [중앙포토]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해졌어도 보조 장치를 달고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는 김종필 전 총리. [중앙포토]

JP는 다재다능한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동서고금 역사에 정통하고 문학적 소양이 넘쳤다. 청소년 시절 학교 수업에 빠질지라도 ‘하루 한 권 독파주의’는 반드시 지켰다고 한다. 독서 취미가 평생 JP 교양의 자양분이었다. JP는 유언에 따라 국립 현충원이 아닌 고향 부여에 묻히게 된다. 그는 “나는 사랑하는 아내(부인 박영옥 여사, 2015년 별세)가 누워 있는 양지바른 고향 땅에 가겠다”고 했다. 김종필과 박영옥의 낭만적 순애보는 널리 알려졌다. 남자는 여자에게 “한번, 단 한번, 단 한 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라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로 프러포즈했다.

전영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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