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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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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⑳

“미국은 이승만이라는 ‘또 다른 적(another enemy)’을 만난 것 같다.”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목전에 둔 1953년 6월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NSC)에 참석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날 한국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에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강경했습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분노가 담긴 전문을 받고는 “우리는 이제 각자 다른 쪽으로 떠나야 하는 갈림길에 들어섰다”며 엘릭스 브릭스 주한 미 대사를 돌려보낼 뿐이었습니다.

‘친미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지만 사실 그의 집권기 대부분은 워싱턴과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후반부엔 미국에서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할 정도로 악화일로였습니다. 동맹 관계인 한·미 지도자가 이처럼 극심하게 대립한 경우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갈등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후엔 문맥 편의상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줄여서 호칭하겠습니다.)

1952년 한국을 방문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오른쪽)과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악수를 하고있다. [중앙포토]

1952년 한국을 방문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오른쪽)과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악수를 하고있다. [중앙포토]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잘못된 만남

당초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기대가 컸습니다. 그는 전임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이 전쟁에 소극적이라며 불만이 많았습니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면서 반공의식이 투철했기 때문에 ‘궁합’이 잘 맞을 듯 했죠.

하지만 한미 동맹의 역사를 보면 양측 지도자의 성향이나 이해관계가 빗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때가 그랬습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10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유세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전쟁의 ‘명예로운 조기 종식’을 실현할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양측이 지금의 휴전선 인근에서 일전일퇴를 되풀이하던 중이었습니다. ‘명예로운 조기 종식’은 결국 휴전을 의미했습니다. 이승만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셈입니다.

1952년 12월 방한한 미국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경기도 광릉의 수도사단을 시찰하는 모습니다. 맨 앞줄 오른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 아이젠하워 당선자 ,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다. [중앙포토]

1952년 12월 방한한 미국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경기도 광릉의 수도사단을 시찰하는 모습니다. 맨 앞줄 오른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 아이젠하워 당선자 ,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다. [중앙포토]

다급해진 이승만은 아이젠하워가 당선 직후 한국을 찾아오자 ‘휴전 반대’와 ‘북진 통일’ 추진에 협조를 구했습니다.
전쟁의 조기 종식을 공언한 아이젠하워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였죠. 첫 만남부터 불편했던지 아이젠하워는 방한 3일동안 이승만을 만나는 데는 고작 1시간 정도만 할애하고 돌아가버렸습니다.

이승만의 아슬아슬한 '벼랑 끝 전술' 

아이젠하워가 돌아간 뒤 1953년 4월부터 휴전회담이 물살을 타기 시작하자 이승만을 필두로 한 한국 측 저항도 가속화됐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휴전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4월 하순 국회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6월 18일엔 2만5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시키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는데, 휴전 대화를 막으려는 의도적인 행위였습니다. 당시 휴전협정의 최대 쟁점이 포로교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서 소개한 워싱턴을 경악시킨 바로 그 사건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25일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발발 3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뒤로는 '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중앙포토]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25일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발발 3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뒤로는 '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중앙포토]

존 덜레스 국무장관이 이승만에게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할 권한이 당신에게 있는가. 독자적 행동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자 이승만은 “한국군을 유엔군에서 분리시켜 단독으로 북진 하겠다”며 수위를 더 높여 응수했습니다.

이승만을 제거하라-'에버레디 작전' 

미국 측이 이승만을 제거하는 내용의 ‘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논의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유엔 명의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감금시킨 뒤 군정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 국무부와 합참은 1953년 5월 29일 회의를 열고 ‘플랜 에버레디’의 집행 여부를 집중 검토했지만 실행 여부엔 망설였습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전쟁 와중에 한국 대통령을 감금하고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은 극심한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 무렵 이승만이 주창한 ‘휴전반대 북진통일’은 국민 뿐 아니라 야권의 지지까지 얻는 등 호응도가 높았다는 점도 미국에겐 불리했습니다.

1953년 6월 광주에서 열린 휴전반대 시위 [사진제공=광주광역시청]

1953년 6월 광주에서 열린 휴전반대 시위 [사진제공=광주광역시청]

사실 이승만도 휴전협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단독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북진 통일이 안 된다면 최소한 얻어내야 할 것은 한국의 안전보장이었습니다.
미국이 휴전회담에 박차를 가하자 이승만은 휴전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먼저 체결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달랐습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국전쟁에 물적-인적 소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휴전 후에는 부담을 최소화 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부담스러운 한미상호방위조약 대신 향후 북한의 남침에 유엔 참전국들이 공동 대응하겠다는 ‘대제재선언(greater sanctions statement)’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이승만은 "그런 건 믿을 수 없으니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보장해달라"고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확답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승만의 선택은 백악관을 괴롭히는 '벼랑 끝 전술'이었습니다.

1951년 11월 4일 휴전회담을 취재하러 온 유엔 특파원이 텔레비전 뉴스 녹화를 준비하는 모습. 왼쪽의 카메라맨은 웨이드 빙햄(Wade Bingham)으로, ‘텔레뉴스(Telenews)' 소속으로 활동하며 한국전쟁을 취재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1951년 11월 4일 휴전회담을 취재하러 온 유엔 특파원이 텔레비전 뉴스 녹화를 준비하는 모습. 왼쪽의 카메라맨은 웨이드 빙햄(Wade Bingham)으로, ‘텔레뉴스(Telenews)' 소속으로 활동하며 한국전쟁을 취재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유성운의 역사정치]

'벼랑 끝 전술'의 결실

결국 아이젠하워는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해 이승만 설득 작업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1953년 6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17일간의 협상 끝에 양측이 도달한 결론을 이렇습니다.

이승만이 양보한 것은 ①휴전협상을 방해하지 않고, ②전쟁 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한 것입니다.
대신 미국으로부터 얻은 것은 ①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②2개 사단 규모의 미군 주둔 ③한국군을 30개 사단 규모로 증원하며 전력의 현대화 지원 이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가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제공=휴머니스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가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제공=휴머니스트]

이같은 내용을 담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1월 17일부터 정식 비준됐습니다. 또한 한미 양국이 원하는 한 ‘무기한(indefinitely)’ 유효하다고 선언됐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극도로 미워했던 이승만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준 셈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국 측은 단독 북진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승만이라면 충분히 위험한 시도를 벌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인식은 윌터 로버트슨 특사가 “이승만은 자신과 자신의 국가를 자살 행위로까지 몰고 갈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고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2층에 전시된 6·25전쟁 휴전협정서 사본. 서명을 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의 이름이 보인다.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2층에 전시된 6·25전쟁 휴전협정서 사본. 서명을 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의 이름이 보인다.

이승만이 ‘위험한 시도’를 벌여 휴전 회담이 중단되거나 전쟁이 더 번진다는 것은 아이젠하워에게 악몽에 가까웠습니다. 아이젠하워로서는 ‘명예로운  종전’을 완성하는 타협을 선택하는 것이 차선책이었던 것이죠. 또한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면 향후 한국군의 북진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됐습니다.
즉, 주한미군은 이승만에게는 '한국의 안전 보장'을, 아이젠하워에게는 '한국의 단독 북진 방지'를 위한 안전핀이었던 것입니다.

냉전 종식 후 재조명 받은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습니다.
미국의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던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수정주의 학설이 유행하면서 한국전쟁이나 주한미군 주둔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의 산물이고, 이승만은 충실한 ‘사냥개’ 같은 이미지로 채색됐습니다.

새로운 국면이 조성된 것은 1990년대부터입니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많은 기밀문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미국 측 외교안보 문서의 비공개 기간이 해제되면서입니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이 드러났고, 이승만이 미국을 상대로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정황이 속속 확인됐습니다.

‘전쟁광’으로 묘사됐던 그의 북진통일론도 상당 부분 재평가가 진행됐습니다.
물론 당시 북진통일론이 국론을 결집시켜 대내적 불만을 억제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측면에서 이용된 것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의 위상과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써 활용됐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1990년 포항에서 실시한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1990년 포항에서 실시한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당초 미국은 동아시아를 냉전의 전초기지로 만드는 기본 구상 아래 한국은 일본에 대한 부속품 정도로 여겼습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고려는 극동지역 미군총사령관인 존 헐 장군의 발언에도 잘 드러납니다.

“한국의 가치는 오직 한국이 일본을 어느 정도 군사적으로 보호하고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이승만의 '투쟁' 과정 속에서 한국은 ‘특별관리 대상’으로서 승격됐고, 당초 백악관이 설계했던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얻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이 방한했으며, 한국 대통령은 이승만을 시작으로 미국을 방문하면 미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특권’이 예외없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1998년 6월 10일 미국을 공식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중 상하원의원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998년 6월 10일 미국을 공식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중 상하원의원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반면 미 대통령 중 일본을 최초로 방문한 것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1975년)이며, 일본의 총리 중 의회 연설을 했던 것은 이케다 하야토와 기시 노부스케, 아베 신조 등 3명 뿐입니다. 상·하원 합동 연설로 좁히면 2015년 아베 신조가 처음 입니다. 한국과 비교하면 60년 가까이 늦은 셈입니다.

'벼랑 끝 전술'을 '벼랑 끝 전술'로 봉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2일 꺼내든 '주한미군 철수론'이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아니지만 (여건이 허락 되는대로)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 오전 회담장인 카펠라 호텔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위해 만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싱가포르 통신정보부 제공)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 오전 회담장인 카펠라 호텔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위해 만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싱가포르 통신정보부 제공)

많은 전문가들과 미국 조야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으로부터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는 보장받지 못한 것을 비판하는 한편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북한의 외교적 승리라고 평가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주한미군은 이승만이 벌인 ‘벼랑 끝 전술’의 '결실'이었습니다.
주한미군 시스템에 대해선 찬반 양론이 있지만, 냉전 시기에 분단국인 한국에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해외 투자를 촉진하는 등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준 측면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반면 북한에겐 그 자체로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면 북한 김정일-김정은 부자가 '핵 카드'라는 ‘벼랑 끝 전술’로 이를 봉인하게 되는 셈입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데 북한은 핵을 가졌으니, 다시 한국의 '벼랑 끝 전술' 차례일까요? 그보다는 남북한의 평화 정착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로 마무리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차상철, 『아이젠하워, 이승만, 그리고 1950년대의 한미관계』,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북진·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홍석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냉전외교정책』을 참고했습니다. 또한 기사에 인용한 주요 발언은 미국 외교비망록인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 FRUS )」을 위 논문을 통해 재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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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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