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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자녀 성추행범 몰린 태권도 사범의 기구한 4년…무죄 확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주한미군 부대 인근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송인순씨와 수강생들. 대부분 주한미군 자녀들이다. [사진 워리어 태권도장 페이스북]

주한미군 부대 인근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송인순씨와 수강생들. 대부분 주한미군 자녀들이다. [사진 워리어 태권도장 페이스북]

12살 난 주한미군 자녀를 성추행한 혐의로 4년 2개월 동안 법정에 섰던 태권도 사범이 지난달 무죄를 확정받았다.

송인순(46)씨는 2005년부터 대구 미군 부대 근처에 도장을 열고 미군 자녀들을 상대로 태권도를 가르쳐 왔다. 대부분 10살 안팎의 어린이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그를 '마스터(사범) 송'이라고 부르며 곧잘 따랐고, 친해진 가족과는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다.

2014년 3월, 미군은 송씨의 태권도장을 '접근제한 구역'으로 설정했다. 송씨가 수강생 성추행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으니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거였다.

송씨의 태권도장에 접근을 제한한다는 미군의 공지. [USAG Daegu 페이스북]

송씨의 태권도장에 접근을 제한한다는 미군의 공지. [USAG Daegu 페이스북]

2012년 11월부터 1년 3개월 동안 당시 12살이었던 C양과 A양에게 입을 맞추고, 몸을 겹쳐 엎드리거나 엉덩이를 만졌다는 혐의였다. C양의 부모가 송씨를 미군에 신고하면서 대구 사령부와 대구 경찰이 조사에 나섰다.

소문은 금세 퍼졌지만, 도장은 문을 닫지 않았다. '마스터 송'을 지지하는 미군 부모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송씨의 도장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미군의 공지 글엔 "5년간 그를 알아왔는데 그는 본인의 길에서 절대 벗어나는 사람이 아니다" " 수사가 한쪽 이야기만 듣지 말고 공정하게 진행되기 바란다" "그의 수업을 통해 친절함과 너그러움을 배우는 경험을 빼앗지 말아달라"는 미국인들의 댓글이 달렸다.

송씨의 태권도장 출입제한 조치에 많은 학부형들이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다. [USAG Daegu 페이스북]

송씨의 태권도장 출입제한 조치에 많은 학부형들이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다. [USAG Daegu 페이스북]

송씨는 엎드리거나 엉덩이를 만진 적은 없지만, 포옹하거나 뺨에 뽀뽀를 한 적은 있다고 인정했다. "체벌과 격려에 있어 모든 수련생을 동등하게 대해왔고, 칭찬받을 일이 있을 때 수련생들과 포옹과 뽀뽀를 하는 등 많은 스킨십을 하며 수업을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경찰과 검찰은 여기에도 성적인 의도가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며 미국에 돌아간 이들까지 나섰다. "아이들을 늘 안아주고 얼굴에 입 맞추며 따뜻하게 대해줬다. 아이들을 직업적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아들딸처럼 이해해주고 노력했다(육군 중사의 아내 J씨)" "한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마스터 송과 보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조금이라도 부적절한 행동이 있었다면 내 아이들을 그의 근처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육군 중령의 아내 Y씨)" 미국에서 이메일로 보내온 진술서는 37통에 달했다.

송씨는 태권도 수업의 특성과 주한미군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포옹과 얼굴에 입을 맞추는 등의 스킨십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워리어 태권도 페이스북]

송씨는 태권도 수업의 특성과 주한미군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포옹과 얼굴에 입을 맞추는 등의 스킨십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워리어 태권도 페이스북]

송씨는 '주한미군 자녀의 태권도 사범'은 단순한 학원 선생님이 아닌 보모나 부모 역할을 겸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파병된 주한미군의 경우 편부·편모인 가정이 많다. 자신이 부대에서 일하는 동안 육아 목적으로 태권도장에 등록한다. 그들은 저를 단순히 태권도 사범이 아닌 미국 문화에서의 보모나 제2의 부모·친구로 생각하며 지내왔다." 구속영장실질심사 때 그가 주장한 내용이다.

구속은 면했지만 긴 재판이 시작됐다. C양과 A양은 피해를 주장한 뒤 그 해와 이듬해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송씨의 유죄를 증명하려는 검찰은 두 소녀를 증인으로 부르려 했지만, 두 소녀는 응하지 않았다. 그사이 해가 바뀌었고 담당 판사도 바뀌었다.

남은 것은 두 소녀가 떠나기 전 남긴 진술과, 두 소녀와 함께 도장을 다닌 목격자들이었다.

진술은 잘 번역되지 못했다. 경찰이 통역을 맡긴 사람은 전문통역인이 아닌 미군부대 앞 부동산업자였다. 이 통역인은 C양이 한 말 중 모르는 단어를 검색해본 뒤 통역하거나, C양이 말하지 않은 내용을 덧붙여 전달하기도 했다. "태권도가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처음 배울 때만큼 즐겁지 않았다(It started to get a little boring. So I didn't enjoy it as much as I used to.)"는 말이 "태권도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조금 싫어지기도 했는데 더군다나 이런 일까지 일어났으니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로 옮겨졌다. 송씨의 변호인은 녹음된 영어와 번역된 녹취록을 비교해 이를 바로잡았다.

대구 수성구 대구지방법원 전경. 김정석기자

대구 수성구 대구지방법원 전경. 김정석기자

피해자들이 목격자로 지목한 H양은 법정에 나와 "C양이 보지 않은 것을 봤다고 거짓말해 달라고 했다" "C양이 태권도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면서 좋아했다"고 말했다. A양도 C양이 시켜서 거짓말을 했을 거란 말도 남겼다.

H양이 A양에게 "우리 아빠가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너랑 놀지 말래"라고 했더니 "C양이 거짓말을 하라고 시켰어"라는 답을 들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목격자인 G군은 "마스터 송이 C양을 안고 뺨에 뽀뽀하는 걸 봤다"면서도 "이는 나를 포함한 모든 원생에게도 하는 평범한(normal) 일"이라고 말했다.

대구지법 형사12부(부장 정재수)는 지난 2월 송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C양이 태권도장에 가지 않기 위해 송씨가 자신을 추행했다고 거짓말을 했거나 적어도 과장해서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기소된 지 3년 11 개월 만의 1심 선고였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새로운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항소심은 2개월 만에 끝났다. 대구고법 형사1부(부장 박준용)는 지난달 17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검찰은 상고하지 않았고 송씨의 무죄는 확정됐다.

사건이 터지며 수강생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긴 했지만, 송씨는 여전히 미군 자녀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은 2010년 야외수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워리어 태권도장 페이스북]

사건이 터지며 수강생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긴 했지만, 송씨는 여전히 미군 자녀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은 2010년 야외수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워리어 태권도장 페이스북]

아이들은 피해를 주장한 뒤 한국을 떠났다. 송씨는 그 아이들이 남긴 주장과 한국에서 4년 넘게 싸웠다. 긴 고통 끝에 무죄를 받은 송씨는 덤덤했다.

"우리 도장에 아직 그 아이들 사진이 있어요. 학부형들에게 제가 받는 재판에 대해 말하지만, 한 번도 누구인지 짚어 밝힌 적은 없어요. 아이들이잖아요. 크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그렇겠죠."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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