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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 오르면 전생이 궁금해지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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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시 한수] 전새벽의 시집 읽기(10)  

어느 시를 읽다가 시인이란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러스트=김회룡]

어느 시를 읽다가 시인이란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러스트=김회룡]

어느 시를 읽다가 시인이란 이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사람, 가슴에 들불이 꺼지지 않은 사람,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자괴감 섞인 의문을 오래 품은 사람, 그 의문이 오래되어 가끔은 전생까지 자문해보는 사람 말이다.

남산을 지날 때면 점(店)이 보고 싶어진다
왜 흘린 세월이 한 번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알고 싶어진다
꼬리가 있었는지 뿌리를 가졌는지

남산에서는 오래전을 탈탈 털어 뒤집어쓰고 끊어진 혈을 여미고 싶다
이빨이 몇이었는지 불에 잘탔는지
모가지는 하나였는지 화석은 될 만했는지
속절없는 기미들을 가져다 멋대로 차려놓고 싶다

-이병률, ‘비정한 산책’ 앞부분. 시집 <눈사람여관(문학과 지성사, 2013)>에 수록

사랑을 앓는 사춘기 청소년 같은 시인  

이병률 시인. [중앙포토]

이병률 시인. [중앙포토]

글쓴이 이병률은 인기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기의 비결은 아마 그가 시인 중에서도 특히 유난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유난스러움은 시인이 남산 어귀 지날 적에 잘 드러난다. 남산을 지나면서 시인은 태연함을 잃는다. 문득 아린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새삼 고민에 빠지다니, 실로 사춘기의 청소년과 같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춘기엔 다 그렇다. 모든 고민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 시인은 오늘도 그렇게 자기를 탓한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할까? 왜 이렇게 약할까? 그러다 전생에 대한 의문도 품어 본다. 전생에 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꼬리 달린 짐승이었나, 뿌리 달린 식물이었나, 대체 어떤 종(種)이었기에 이생에 이토록 연약하게 태어났을까 하고.

간절히 점을 보고 싶다
삭제된 것들의 입장들
우물쭈물하는 옛날들
세수 안 한 것들의 밤낮들
끝이 언제인지 모르면서
나에게 잘 해주지 못한 안색들

결국은 이것들로 목숨 한 칸의 물기를 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조심하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며
곧 해결될 거라는 말도 아닌
어서 끝내라는 말만 듣고 싶다

-같은 시, 중간 부분

‘삭제된 것들의 입장들’이라는 시어가 인상 깊다. 시인은 속으로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다. 이런 고민에 대해, 전생의 나였다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풍부한 공기에 대담히 말을 풀어놓고 싶다
이 숲 나무에서는 소금 맛이 나는지
그 맛에 사람 맛이 들어 있는지를 알고 싶다

나에게 이토록 박힌 것이
파편인지 비수인지
심장에서 내몬 사람이 하나뿐인지

사람을 갖겠다 해놓고는 못 가졌으면서
훗날 다른 생에서도 사람을 갖고 싶은지까지도

-같은 시, 끝부분

눈사람 여관, 이병률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3. [중앙포토]

눈사람 여관, 이병률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3. [중앙포토]

시인은 나무 한 그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무에도 전생이 있을까. 혹시 물고기나 해초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도 바닷가의 소금기를 머금고 있을까. 사람이 땀을 흘리면 소금을 남기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도 바다에서 왔기 때문은 아닐까.

한편 제7연은 본격적이다. 전생 타령하며 딴청을 피우던 시인이 비로소 아픔을 드러냈다. “이토록 박힌 것이”라는 행에서 더욱 궁금해진다. 대체 시인을 이토록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 연에서 비로소 비밀이 해결된다. 시인을 남산까지 오게 한 것, 전생마저 궁금하게 만든 것, 사람을 가지고 싶었던 일, 끝내 가지지 못했던 일, ‘사랑’이다.

전생을 궁금하게 만든 것은 ‘사랑’ 

세상에 사랑에 대한 시와 산문은 대체 몇 편이나 될까? 모르겠지만, 이렇게 짐작해본다. 남은 생을 그것들 읽기에만 바친다 할지라도 다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라고. 그런 와중에 사랑이라, 너무 뻔하다. 뻔해서 힘이 빠지지만 한편으론 안심했다. 그것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과잉인 시대에도 그것에 대해 읽고 쓰는 것이 의미 없지 않다는 것을 시인이 보여준 듯해서. 나도 조금 더, 그것에 진실하게 다가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인을 남산까지 오게 한 것, 전생마저 궁금하게 만든 것, 사람을 가지고 싶었던 일, 끝내 가지지 못했던 일, ‘사랑’이다.[사진 pixabay]

시인을 남산까지 오게 한 것, 전생마저 궁금하게 만든 것, 사람을 가지고 싶었던 일, 끝내 가지지 못했던 일, ‘사랑’이다.[사진 pixabay]

오늘도 ‘사랑 앓는 사춘기 시인’의 이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전생을 노래하다 후생까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과연 다음 생애에도 사랑하게 될까? 또 사람에 대한 욕심을 내다가 마음을 다치게 될까? 그리하여 그의 기억이 배긴 어느 장소에서 끌탕을 하며 또다시 노트와 펜을 꺼내게 될까? 그 답을 전하지 않은 채 시는 끝이 난다.

어쩌면 깊은 혼란이 멈췄는지도 모르고, 그것은 남산을 벗어났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남산 때문에 피어오른 기억이라면 필시 남산에서 만들어진 기억일 것이다. 시인은 남산으로부터 멀어지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음번에 이곳에 오게 되면 약해지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이라도 했을까? 그리고선 곧바로 ‘대체 이렇게 다짐하는 게 몇 번째람’ 하는 생각에 피식 웃기도 했을까?

오늘의 글은 예언을 하나 하는 것으로 끝마쳐 볼까. 시인은 또 슬픔에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남산뿐 아니라 한강, 설악산, 서해를 지나며 그렇게 될 것이다. 옛 기억에 몸이 달아서는 전생 운운하며 또 비탈진 마음을 읊어댈 것이다. 어째서 속단을 하는가 하면, 시인이란 게 애당초 그런 존재들이라서, 도무지 사춘기가 끝나지 않는 사람들이라서.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어른을 어디에 쓰냐고 힐난하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덕분에 그런 기억들이 떠올랐다. 굳이 쓸데는 없는 기억들, 소모적이고 예의 없는 기억들,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조금 있는 편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기억들이.

이병률 시인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06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시집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등 발간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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