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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원자로 폐쇄, IAEA 사찰 담은 1994년 제네바 합의보다 후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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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94년 제네바 핵 합의 당시 서명 장면. [중앙포토]

1994년 제네바 핵 합의 당시 서명 장면.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 뒤 발표한 6·12 공동성명이 비핵화 문제에서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개 항으로 이뤄진 공동성명은 평화·번영의 북·미 관계 수립,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북한의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노력, 한국전 미군 포로·실종자 유해 발굴 등의 내용을 선언적이고 포괄적으로 담았다. 정작 양국 최대 현안이자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북한 비핵화의 구체적인 목표·절차·검증 등은 후속 대화로 미뤘다.

6·12 성명, 과거 합의와 비교해보니 #2005년 부시 정부 9·19 성명 땐 #북 핵무기 파기, NPT 복귀 구체 명시 #이번 성명은 첫 정상회담 결과물 #신뢰 바탕, 구체적 논의 진전돼야

이 때문에 한국·중국 정부 등의 긍정 평가에도 뉴욕타임스(NYT)·워싱턴포스트(WP) 등 상당수 미국 미디어와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디테일(세부사항)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특히 그간 북·미 간에 합의해 발표했던 1994년 제네바 합의, 2000년 공동 코뮈니케,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보다 후퇴했다는 평가를 피하기가 어렵다. 과거 합의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미 민주당의 빌 클린턴 행정부와 북한의 김정일 정권(김일성 주석은 7월 사망)이 1994년 10월 21일 끌어낸 제네바 합의는 서로 할 일을 상세하게 규정했다. 당시 북한은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한 흑연감속형 원자로와 관련 설비를 폐기하기로 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북한에 (핵물질 추출이 어려운) 중수로 원자로를 건설해주고 중유를 공급하기로 했다. 북·미 간 수교와 평화협정 체결 등 관계 정상화 목표도 상세히 담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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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북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어떻게 해체할지와 관련한 방식과 일정을 소상하게 합의했다. 경수로 건설 진척 상황에 국제기구의 사찰과 검증, 그리고 흑연감속로와 관련 핵 설비 폐기, 핵연료의 국외 반출 시기를 연동하는 ‘행동 대 행동’ 원칙도 확립했다. 하지만 공화당 주도의 미 의회에서 경수로 건설 예산의 승인을 거부하고, 99년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면서 합의는 2003년 파기 운명을 맞았다.

2000년 10월 12일 클린턴 행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방미한 조명록 차수와 함께 발표한 북·미 공동 코뮈니케도 당시 기대를 모았다. 양측은 상호 적대 의사가 없음을 선언하고 정전체제를 평화보장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외교관계 정상화, 경제협력·교류발전 추진도 포함했다. 이후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협의를 위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다. 하지만 2001년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코뮈니케는 휴지조각이 됐다.

당시 코뮈니케에선 북·미가 미사일 관련 협상을 하는 동안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싱가포르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하는 동안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할 것임을 시사해 대조를 이룬다. 트럼프가 6·12 공동성명 제4항에 삽입한 미군 유해 발굴 문제도 이미 18년 전 북·미 코뮈니케에 담긴 내용의 복제판이다. 2000년 코뮈니케에서 미국은 북한의 실종 미군 유해 발굴 협조에, 북한은 미국의 식량·의약품 지원에 각각 감사의 뜻을 표했다.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북한의 함경남도 장진호 지역과 평안북도 운산 등에는 미군과 국군 등 유엔군 유해가 5000구 이상 묻힌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과 북한은 1996~2005년 33차례에 걸쳐 공동 또는 단독 발굴작업으로 유해 229를 수습했다.

2005년 9월 19일엔 당시 남북한과 미·중·일·러가 제4차 6자회담 중에 9·19 공동성명을 내놨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현존하는 모든 핵 계획을 포기하며,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조속히 복귀해 안전 조치와 검증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 대가로 미국 등은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 대북 에너지 지원,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개시 등을 약속했다. 북한을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고 북·미 간 신뢰구축을 추구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 과정에서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이라는 원칙을 정착시켰다는 평가다. 이 성명도 북한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하면서 사문화됐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9·19 공동성명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북·미가 함께 이룬 외교협상의 결과다. 북·미 간 첫 정상회담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비중이 대단하다. 지난해 북한의 6차 핵실험과 잇따른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이뤄졌다는 점에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북핵 폐기의 원칙·목표·일정·절차·검증방식 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없이 포괄적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에 그쳤다는 점은 지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상세하고 구체적인 합의라도 신뢰와 행동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이는 제네바 합의, 북·미 공동 코뮈니케, 9·19 공동성명의 운명이 잘 말해준다. 앞으로 북·미 간 고위급·실무급 협상과 워싱턴이나 평양에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는 추가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비핵화 논의가 진전되도록 외교력을 집중할 때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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