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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레저터치] 화담숲 생수 할아버지를 기억하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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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레저터치 

LG 고 구본무 회장의 숨결 숨쉬는 화담숲 #수시로 방문했던 ‘회장님’, 아무도 몰라봐 #새 좋아해 새집 많아, 조류도감 펴내기도

비로소 입을 연다. 2013년부터 십수 번 ‘화담숲’을 들락거렸던 인연으로서,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화담숲에 남긴 일화를 공개한다. 오해는 마시라. 미처 밝히지 못한 이야기를 이제야 할 따름이다. 나로서는 ‘회장님’을 언급하지 않고서 화담숲을 말하느라 여태 곤혹스러웠다.

화담숲 안에는 모노레일이 다닌다. 수목원이 가파른 산비탈에 기대어 있어서다. 이끼원 입구에 모노레일 탑승장이 있다.[중앙포토]

화담숲 안에는 모노레일이 다닌다. 수목원이 가파른 산비탈에 기대어 있어서다. 이끼원 입구에 모노레일 탑승장이 있다.[중앙포토]

화담숲의 ‘화담(和談)’은 알려졌듯이 고인의 아호다. 화담숲은 고인의 아호를 받은 LG그룹 유일의 수목원이다. 곤지암리조트 정문 안에 있어서 리조트 시설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화담숲은 고인이 이사장이었던 LG상록재단의 재산이다. 화담숲 주인이 LG그룹의 사회복지법인이라는 사실은, 이 리조트 옆 수목원이 애초부터 손님 받아 돈 벌 생각이 없었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화담숲의 가을 풍경. 수목원에 내려앉은 단풍이 현란하다. 화담숲은 11월 말까지만 개장하고 겨우내 문을 닫는다. 손민호 기자

화담숲의 가을 풍경. 수목원에 내려앉은 단풍이 현란하다. 화담숲은 11월 말까지만 개장하고 겨우내 문을 닫는다. 손민호 기자

실제로 화담숲은 슬로프에 꽃을 심어 여름 장사를 하는 스키장 꽃밭과 차원이 다르다. 스키 시즌이 시작되면 화담숲은 문을 걸어 잠근다. 다른 수목원은 비닐하우스를 짓고 온갖 조명을 들여 겨울 장사를 하지만, 화담숲은 겨울잠에 들어간다. 수목원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수목이어서이다.

화담숲의 '미완성 소나무 정원'. 명품 소나무를 예술 작품처럼 감상하며 산책하는 정원이다. [중앙포토]

화담숲의 '미완성 소나무 정원'. 명품 소나무를 예술 작품처럼 감상하며 산책하는 정원이다. [중앙포토]

화담숲 부지는 2006년 매입했고, 이듬해 조성을 시작했다. 2010년 리조트 숙박객에게만 출입을 허용했고, 2013년 전면 개장했다. 이 4년 사이 화담숲은 소문만 무성한 수목원이었다. ‘LG가 명품 수목원을 숨기고 있다.’ 뭐, 이런 소문이었다. 이태 전에는 고가(高價)의 소나무 330여 그루를 심어놓고 ‘미완성 소나무 정원’이라고 스스로를 낮췄다. 화담숲은 그렇게 긴 세월, 조심조심 공들인 수목원이다.

화담숲 구석구석에 고인의 숨결이 배어 있다. 이를테면 이끼원. 화담숲이 개장과 함께 내세웠던 공간이다. 이끼 30여 종을 산기슭에서 키웠다. 바람·습도·빛 등 이끼의 생육조건을 맞추는 연구를 거듭했고, 공중의 습도도 자동 조절하는 장치를 들였다. 그러나 이끼는 기대만큼 성하지 못했다. 고인은 이끼원에서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요?”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고 구본무 회장이 펴낸 조류도감 『한국의 새』 표지.

고 구본무 회장이 펴낸 조류도감 『한국의 새』 표지.

화담숲에 새집이 많은 것도 고인이 새를 좋아해서였다. 국내외 조류 전문가들을 모셔 『한국의 새』(2000)라는 도감을 펴냈을 정도다. 발간사에서 고인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값진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조화는 기업인 화담의 경영철학이다.

고인은 시도 때도 없이 화담숲을 드나들었다. 지난해 4월 첫 뇌수술을 받은 뒤 가장 먼저 찾은 곳도 화담숲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입장객 누구도 회장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해만 87만명이 화담숲을 찾았지만, 전지가위 허리춤에 차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점퍼 차림의 할아버지가 대기업 회장님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화담숲의 봄 풍경. 다리 아래 왼쪽이 이끼원이고 오른쪽이 철쭉원이다. 명품 정원 같은 풍경이다.[중앙포토]

화담숲의 봄 풍경. 다리 아래 왼쪽이 이끼원이고 오른쪽이 철쭉원이다. 명품 정원 같은 풍경이다.[중앙포토]

알아차리진 못했어도 마주친 적은 있었을 터이다. 벤치에 앉아 쉬는 참이었는데 생수를 건넨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누구세요?” 물었더니 “물 주는 사람이오” 장난스레 대답했다면 새와 꽃과 나무를 좋아해 기어이 자연으로 돌아간 그 기업인이었을 터이다.

화담숲에 ‘화담’은 이제 안 보일 것이다. 그래도 화담의 뜻은 길이 이어지길 바란다. 명품은 대를 이어야 비로소 명품이다.

 손민호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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