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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사이버불링 이겨내고 공보물 찍으려 무릎 꿇고 빌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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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의 이슈 현장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가운데)의 8일 서울 서강대 유세. 신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에 녹색당의 상징색인 녹색과 페미니즘의 상징색인 보라색 티셔츠를 번갈아 입었다. [사진 녹색당]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가운데)의 8일 서울 서강대 유세. 신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에 녹색당의 상징색인 녹색과 페미니즘의 상징색인 보라색 티셔츠를 번갈아 입었다. [사진 녹색당]

9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홍대 상상마당 앞.

6·13 지방선거 군소후보 동행취재 #당락 떠나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 #녹색당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 #아이돌급 인기로 구글트렌드 3위에 #군소정당 난립 걱정은 박정희 유물 #정치관계법 고쳐 진입장벽 낮춰야

회색 바지와 흰색 재킷에 페미니즘의 상징색인 보라색 티셔츠를 받쳐 입은 신지예(28)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가 유세 차량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신 후보는 “이제까지의 정치는 여성·청년·성 소수자·동물 등 약자는 뒷전이었고 소수자 권리는 배제됐다”며 “진짜 정치는 시대의 약자 편에 서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페미니스트 시장’을 으뜸 구호로 내세운 신 후보는 미투 운동과 혜화동 여성 시위로 이어지는 페미니즘 열풍 덕분에 군소정당 후보임에도 이름을 제법 알렸다. 네티즌 관심도를 반영하는 구글 트렌드에서 9명의 서울시장 후보 중 안철수·박원순 후보에 이어 3위에까지 올랐다. 선거 포스터가 곳곳에서 훼손되고 인터넷에서 집단 공격을 당하는 사이버불링(cyber bullying)이 심해진 탓도 있다. 기존 정치에 도전하는 당당함을 보여주기 위해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어느 남성 변호사로부터 사진이 “X시건방지다”는 얘기까지 들어야 했다. 신 후보는 유세에서 “인터넷에서 ‘칼로 가슴을 도려내고 싶다’는 사이버불링까지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후보는 원래 이날 오후 혜화동 여성시위에 참여할 예정이지만 불발됐다. 주최 측이 선거에 뛰어든 단체장 후보 자격으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도 좀 다른 듯했다. 혜화동 시위는 여성 권리에 집중하고 시위엔 여성만 참여했다. 신 후보는 여성 차별과 혐오를 비판하지만 남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김영준 서울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여성이 존중받아야 남성을 포함한 사람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녹색당 선거운동은 당원 중심이었다. ‘국장’ ‘위원장’ 같은 정당의 직책 대신, 이름 뒤에 ‘님’을 붙여 서로를 불렀다. 신 후보도 그저 ‘지예님’이었다. 선거 사무실은 ‘페유(페미니스트 유토피아)’로 불렸다. 젊은 층이 많았지만 30, 40대 열성 당원도 꽤 됐다. 선거운동원 중엔 외국인도 있었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순천향대에 유학 온 오스틴 베이쇼어(21)는 미국 녹색당원이다. 베이쇼어는 천안에서 올라와 피켓을 들고 온종일 신 후보 유세에 동참했다. 글로벌 네트워크가 강하다는 녹색당의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 같았다. 베이쇼어는 “페미니즘, 비폭력, 사회정의, 생태적 지혜 등은 미국 녹색당의 10가지 핵심가치”라고 말했다. 유세에선 신 후보와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젊은 유권자들이 많았다. 두 주먹을 가슴 앞에 불끈 쥐고 “화이팅”을 외치며 지나가는 젊은 여성들이 여럿이었다. 거대 정당 후보 부럽잖은 인기였다. 녹색당 서울시장 선거본부의 김형수 공보담당은 “대학가 유세에선 아이돌 못지않은 관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신 후보 선거 캠프에서 대외적으로 밝히는 득표 목표는 5%지만 내부적으로는 3%로 잡고 있다. 2012년 창당한 녹색당은 그해 19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이 0.48%에 그쳐 정당법에 따라 등록 취소되는 바람에 ‘녹색당 더하기’로 당명을 바꿔 재창당해야 했다. 하지만 해당 정당법 조항이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아 원래 당명인 녹색당을 되찾았다. 김형수 공보담당은 “녹색당은 탄생한 지 겨우 6년 된 젊은 정당이지만 현존하는 한국 정당 중 가장 오래된 당명”이라고 말했다. 이합집산이 잦고 당명이 자주 바뀌는 한국 정치가 낳은 씁쓸한 기록이다.

3% 득표는 쉽지 않은 목표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녹색당의 정당 득표율은 1%를 넘지 못했다. 녹색당은 페미니즘 순풍을 타고 있는 신 후보와 함께 환경 이슈가 부각된 제주도에서 선전 중인 고은영 도지사 후보에 기대를 걸고 있다. 물론 당선이 아니라 의미 있는 득표가 중요하다고 본다. 녹색당 창당을 주도하고 4년 6개월간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던 하승수 녹색당 당원(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은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가 3.26%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와 한명숙 민주당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지만 그다음 선거에서 당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발판이 됐다”고 말했다.

녹색당의 저녁 유세는 서울 연남동의 경의선 숲길 연트럴파크에서 ‘신지예랑 한 잔 파티’로 예정돼 있었다. 각자 맥주 등 음료수를 준비하고 잔디에 앉아 신 후보와 대화하는 행사였다. 술자리 유세라니, 은근히 기대됐지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아쉽게도 취소됐다. 대신 인근 카페에서 커피 간담회가 진행됐다. 물론 커피값은 참석자들이 각자 계산했다.

이날 연트럴파크에선 기호 9번 우인철(33) 우리미래 서울시장 후보의 유세가 진행 중이었다. 우 후보는 서울시장 후보를 비롯해 비례대표 3명과 기초의원 5명 등 이번 선거에 출마한 9명의 후보 이름과 지역을 하나씩 열거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엷은 빨강의 셔츠를 입은 선거운동원들의 열정이 인상적이었다. 후보 명함을 건네며 “저랑 눈을 맞춰 주세요”라는 말까지 했다. 우 후보는 서울시장 유권자들이 우편으로 받은 공보물 더미에서 가장 소박한 자료의 주인공이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쪽지에 후보자 정보만 간신히 담았다. 정책 공약을 담기엔 종이가 너무 작았다. 우 후보는 “일반 크기의 컬러 공보물은 3억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어 A4 용지 8분의 1 크기의 공보물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그는 이 작은 쪽지 460만장을 찍기 위해 단가가 안 맞아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인쇄소 사장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그의 눈물 나는 사연이 담긴 페이스북 영상을 2만 명이 봤다. 12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유세를 마친 우 후보를 다시 만났다. 그는 “이 시대의 청년에게 ‘잘 지내?’라고 묻기 위해 출마했다”고 말했다.

군소정당 후보들을 가장 힘들게 한 건 선거관련법이 쳐놓은 높디높은 진입장벽이었다. 우인철 후보는 “5000만원의 후보자 기탁금부터 선거공보물 비용까지 신생 정당의 정치신인이 감당하기엔 버겁다”며 “정당을 만들려면 개인정보를 담은 5000명의 당원 명부를 확보해야 하는데 이런 문턱도 너무 높다”고 했다. 여론조사에선 그저 ‘기타 후보’로 분류되고 TV 토론회에 참가해 정책을 알릴 기회도 별로 없다.

정치인과 정치학자를 양성하는 정치발전소 박상훈 학교장은 “정당법·공직선거법 등 우리나라 정치관계법은 작은 정당에 살인적으로 가혹한 정치환경”이라며 “작은 목소리도 합법의 틀 안에서 수용해야 사회 통합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라고 하는데 어느 집단도 혼자서는 다수가 될 수는 없다”며 “현대 민주주의에서 다수는 다양한 소수의 연합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작은 정당이 자리를 잡고 다양한 목소리를 정치권에 반영해야 건전하고 통합된 사회가 될 수 있다. 프랑스 공산당 지지율은 1~2%에 불과하지만 이슬람권에서 이주해온 빈곤 청년들의 지지를 받는다. 이주 청년들의 불만을 사회적으로 대표해 이들이 절망적 테러에 빠지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박상훈 학교장은 “군소정당 난립이 여론 분열이라는 강박관념은 박정희 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일 뿐”이라며 “작은 정당의 설 자리를 위협하는 현행 정치관계법의 문턱을 확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선거는 끝났고 승패는 갈렸다. 기득권 정당과의 힘겨운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