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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읽기

간증, 저주, 그리고 개인숭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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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포털사이트 댓글창을 보면 정치·연예 기사에서 사회·경제 뉴스에 이르기까지 온통 팬클럽들의 전쟁터 같다. 누구누구의 ‘빠’(극성 팬)와 ‘까’(안티 팬)가 치열하게 서로를 헐뜯는다. 심지어 정보기술·과학 분야 기사에서도 삼성 팬, 애플 팬들이 서로를 멸칭으로 부르며 비하하고 도발한다. 외신 정도가 예외일까?

‘팬클럽들의 전쟁’만 남은 공론의 장 #메시아 기다리며 환호와 환멸 반복해

갈등 사안이 불거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슈가 되면,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목소리들이 나오는 사회가 정상이다. 고성이 오가더라도 “이렇게 해결해보자, 아니다, 그 방법 말고 이 방식으로 해보자”며 갑론을박이 벌어진다면 건강하고 생산적이다. 논의가 깊어져 다양한 연관 문제와 커다란 방향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가치와 철학의 토론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가치와 철학을 두고 다투기는커녕, 논쟁 중에 처음의 쟁점조차 흐릿해지는 경우가 잦다. 해결책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나와야 할 자리를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대한 말싸움이 대신 차지하는 탓이다. ‘역시 그가 옳다’ 내지는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지지한다’는 옹호, 옹호의 이유, 반박, 반박의 이유 같은 것들이.

그런 모습이 너무나 맹목적이어서 옹호가 간증으로, 반박은 저주로 보일 때도 많다. 그러다 보면 정책은 내용이 아니라 누가, 혹은 어느 정권이 주장했느냐의 문제가 되고, 노래는 완성도나 작품성이 아니라 어느 뮤지션이 발표했느냐의 문제가 되며, 음주운전도 누가 했느냐를 따지게 되기 일쑤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이번 신곡이 아쉽긴 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아이돌의 노래이니 무조건 음원을 산다’는 마음까지는 그래도 이해한다. 그러나 정치사회 이슈마저 그런 식으로 소비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지만, 정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참여로 이뤄진다. 정치는 여의도에서 잠룡들이 벌이는 게임이 아니며, 우리도 관전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구세주가 어느 날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듯 보인다. 그렇게 내려와 어제 메시아로 보였던 이가 오늘 적그리스도로 판명 난다. 환호와 간증, 환멸과 저주가 그 사이를 메운다. 얼마 뒤 새 예언자가 나타난다.

‘시민사회가 미성숙해서’라고 짧게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이거 좀 심하지 않은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런 유난스러운 개인숭배가 무척이나 한국적인 현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배후에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는 건 아닐까? 몇 가지 가설을 내본다.

① 대중문화 영역에서 시작한 팬덤 문화의 확산. 정치인 팬클럽 현상은 3김 시대로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테고, 연예인 팬클럽도 그렇다. 그러나 1990년대 아이돌그룹과 팬덤 문화가 등장하면서 ‘팬덤식 세계관’이 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감정에서 개인 정체성을 찾고,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집단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② 비주류 계급에 대한 꾸준한 차별과 기회 봉쇄. 한국 사회는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상당히 뚜렷하며, 비주류에게 좀처럼 자원과 기회를 나눠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비주류 신분에 머물러 설움이 쌓이면 누구나 절박해지고 또 조급해진다. 그 부조리를 해결해줄 가능성을 특정 인물에게서 보게 되면 설사 그가 몇몇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실드’를 쳐주고 싶기 마련이다. 그것이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③ 유교 전통과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북한에서는 개인숭배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느냐”고 묻는 소련 간부에게 김일성이 “유교 덕분”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돈 오버도퍼의 『두 개의 한국』에 나오는 얘기다. 혹시 복종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와 교육 탓에 우리는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라는 사실을 자꾸 까먹고, ‘높으신 분’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착각하는 것 아닐까.

④ 제도와 시스템보다는 인물이 다스리는 인치(人治) 사회라서. 회장님의 사모님이 전횡을 부리는 조직에서 경영철학을 논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과 따님의 심기를 살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정치인 몇몇이 심사가 뒤틀리면 없던 정당이 생기고, 있던 정당이 쪼개지는 풍토에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물의 특성과 됨됨이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게 가장 현명하지 않겠는가.

어떤 가설이 옳을까. 모두 조금씩 다 옳다면, 우리의 과제는 참으로 많은 셈이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움직이는 사회를 만들고, 권위주의를 없애고,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벽을 무너뜨리고, 남이 아닌 자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개인들이 돼야 한다는 말이니.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