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많았으나 알맹이가 없었다. 비핵화의 대략적인 시한도,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도 없었다. 반대로 문제가 될 내용들은 적지 않았다.
회담 알맹이 없단 비판 의식한 듯 #“우리가 포기한 건 아무것도 없어” #협상 합의문을 ‘계약서’로 표현 #회견 전 ‘역사 진보’ 한국어 동영상 #북·미 정상 결단 홍보용 이벤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그동안 한국과 미국이 “방어적 훈련”이라 해 왔던 한·미 동맹의 상징인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그쪽(북한) 입장에선 도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또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12일 오후 4시(현지시간)부터 시작된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기자회견 전 이번 협상을 이끈 성 김 필리핀 주재 미 대사는 본지와 따로 만났다. 그는 “당초 기대했던 CVID가 안 들어가고 4·27 판문점 선언에서 진전된 게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정상 간에 할 수 있는 협상의 결과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니냐. 네고(negotiation)라는 게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직답을 피하기 위해 에둘러 말한 외교적 답변이다. 그는 또 “북한의 버티기에 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엔 곤혹스러워하며 말을 아꼈다. 다만 “좋은(good) 회담이었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a lot of works to do)”고 했다.
회견장 주변에서는 “3개의 포괄적인 문서에 사인했다”는 백악관 풀 기자의 연락 e메일 때문에 “공동 합의문 외에 또 다른 부속 합의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는 본지 취재에 “공동성명 1개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회견은 마치 전당대회장의 개막과 같은 이벤트로 시작했다. 웅장한 소리와 함께 5분가량의 비디오가 전방에 마련된 두 개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왔다. 처음은 한국어 버전, 그다음이 영어 버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역사적 결단을 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잘 짜인 영상물이었다. 마치 기업 홍보용 비디오와 같았다. “역사는 대대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는 항상 진화한다. 소수의 사람만이 역사를 위해 노력한다.(중략) 문제는 선택이다. 바로 이 순간 세계는 지켜볼 것”이란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이어 등장한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보는 것을 즐기는 듯 신나게 자신의 성과를 자랑해 나갔다. 다만 합의문에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대통령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얻은 것이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린 지난 24시간 동안 거의 잠도 자지 않고 계속 협상을 했다”며 “우리가 포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날 싫어하는 사람만이 내가 별로 얻은 것이 없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그는 부동산 사업가의 기질을 보여 주듯 공동성명(joint statement)을 이야기하면서 ‘계약서(contract)’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다음은 주요 일문일답.
- 김 위원장은 가족을 죽이기도 하고 주민들을 굶주리게 한 인물이다. 그런데 편안하게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 나이 치고는 1만 명 중 한 명만 해낼 수 있는 일을 했다. 재능 있는 사람으로 26세의 나이에 이런 상황(북한)을 물려받았고 나름대로 통치했다. 강력하게 통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원래 인간성에 대해선 난 잘 모르겠지만 일단 26세짜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하다. (북한에 억류됐다 사망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죽음이 없었다면 이런 일(북한과의 협상)이 없었을 것이다. 아주 잔인하고 비극적이었지만 그 일 때문에 이러한 대화 노력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 (공동성명 내용이) 혼란스럽다. 미국이 양보를 한 것인가.
- “전혀 그렇지 않다. 공동성명을 보면 쉽게 설명이 된다. ‘미국과 북한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되어 있고 또한 안전보장을 이야기하고 있고,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변함없는 의지를 확인한다는 내용이 있다.”
- 김 위원장과 북핵 검증 방법에 대해 논의했나. 국제기구 검증 과정을 얘기했나.
- “논의했다. 물론 검증도 할 것이다.”
-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어떤 말을 했나.
- “김 위원장은 ‘이렇게까지 멀리 와 본 적이 없다. 자신감을 얻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했다. 어쨌든 김 위원장이 이번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하는 것에 관심 있다고 생각한다.”
- 북한 인권과 관련된 논의를 했나.
- “그렇다. 앞으로 더 많이 논의할 것이다. 전사자 유해 송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 평양에 언제 방문할 것인가.
- “언젠가 갈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갈 것이다. 또 김 위원장을 적절한 시기에 백악관에 초청할 것이다. 김 위원장도 초대를 하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릴 것 같긴 하다. 사실 오늘 합의문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은 서명한 이후에 이루어진 얘기가 많다.”
- 어제(11일) 폼페이오 장관은 “이전 대통령들도 이런 종이에 서명한 적 있었지만 북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에는 뭐가 다른가.
- “행정부가 다르다. 대통령도 국무장관도 다른 사람이다. 이전 사람들에게 이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제대로 (일 처리도)하지 못했다.”
- 외교관계 수립은 언제 될 것 같나.
- “조만간 수립되길 바라지만 앞으로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다음 단계는.
- “당장 다음주에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NSC 보좌관이 구체적인 내용을 다시 검토할 것이다.”
싱가포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특별취재팀
김현기·정효식 워싱턴 특파원, 예영준·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정용수·이철재·전수진·유지혜·박유미·윤성민 기자, 강민석 논설위원,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장,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박용한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