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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미혼모, 숨지 말고 당당한 엄마가 되어 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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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6일 오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청소녀 미혼모 공동생활가정 애란영스빌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장진영 기자

6일 오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청소녀 미혼모 공동생활가정 애란영스빌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장진영 기자

미혼모 돌보는 ‘애란한가족네트워크’

[김남중의 공감현장] #미혼모 위한 희망과 가능성의 공간 #학업·양육·취업 도와 자립의 길로 #낙태·입양 대신 출산과 양육 선택 #숨지 않고 당당한 엄마로 살고 싶어 #"일찍 엄마 된 걸 후회하지 않아 #그냥 똑같은 엄마로 봐주었으면" #미혼모 문제 사회적 돌봄 부족 탓도 #청소년 엄마와 아이 품는 사회 돼야

“조금 일찍 됐을 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출산과 양육을 결정한 청소년 미혼모들의 목소리다. 이들이 감내해야 할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은 크다. 학업·양육·취업의 삼중고를 겪는다. 그럼에도 낙태와 입양 대신 내 아이를 직접 키우겠다는 이들의 선택은 숭고하다. 이들이 자립의 꿈을 키우고 당당한 엄마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곳이 ‘애란한가족네트워크’다. 그 중 ‘애란영스빌’은 자립을 준비하는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이다. ‘애란원’과 ‘나래대안학교’에서는 ‘학생 엄마’가 안전하게 출산을 하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곳을 찾아 자립을 위해 애쓰는 미혼모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그들은 “그냥 똑같은 엄마로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 애란영스빌
6일 정오 무렵 서울 마포구 망원동 주택가 5층 빌라에 둥지를 튼 애란영스빌. 현관에 들어서자 위층에서 아기 울음소리와 엄마의 어르는 소리가 들린다. 영락없이 아기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앳돼 보이는 엄마는 포대기로 아이를 가슴에 안고 양손엔 가방을 든 채 외출에 나서는 중이다. “아쿠아리움 놀러 가요.” 상기된 얼굴이지만 설렘이 가득한 표정이다.
 애란영스빌은 미혼모자가 공동생활을 하며 자립을 준비하는 보금자리다. 현재 5가구가 산다. 이들의 생활을 돕는 조해진 복지사가 3층 프로그램실 겸 놀이방으로 안내했다. 아이 셋이 엄마 품에 안겨 들어온다. 겨리(별명·6개월)와 엄마 임모(19)씨, 연이(별명·10개월)와 엄마 배모(20)씨, 윤이(별명·13개월)와 엄마 김모(24)씨다. 휴일이어서 늦잠을 자고 느긋하게 ‘아점’을 한 뒤란다.
 세 엄마 모두 평일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애란한가족네트워크가 위탁 운영하는 ‘내일이룸학교’로 등교해 간호조무사 교육을 받는다. 그만큼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부족해 아쉽다. 겨리 엄마가 불러주는 ‘아기 상어’ 노래에 아이들이 손뼉을 치고 율동 하듯 몸을 움직인다. 엄마들은 “귀여워”란 말을 연발하며 웃음꽃을 피운다. 여느 엄마와 다를 게 없는 보통 엄마들 모습이다.
 “아이가 달려와 안기는 순간마다 가슴이 녹아요. 내 손을 잡고 걷는 걸 보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어요.”(김씨)
 “어린이집에 아기 데리러 갈 때 설레고 만나면 또 설레죠. 종일 못 보다가 보는 순간 기쁘고 힘이 샘솟아요.”(배씨)
 “아이가 엄마를 보고 웃어주는 순간 힘든 게 사라지고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아요.”(임씨)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세 엄마들은 하나같이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용기를 내고 결심을 하는 과정이 쉬웠을 리 만무하다.
 “고교 졸업 직후였어요. 임신 테스트를 했는데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났어요. 처음엔 두려웠지만 아기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면서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죠. 책임을 피하는 남자 친구에게 나 혼자 키우겠다고 선언했어요. 잠든 아이를 쓰다듬는 매 순간 너무 행복합니다.”(임씨)
 “임신 6개월 때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는데 그의 부모에게 얘기했더니 낙태를 권유하더군요. 혼자서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었어요. 입양을 보낼 생각도 했지만 막상 태어난 아이를 보고는 내가 책임지고 키워야겠다고 결심했어요.”(김씨)
 이곳 엄마들은 직업교육을 받은 뒤 취업해 자립하려는 각오가 단단하다. 그 바탕엔 내 아이를 보통 아이들처럼 잘 키우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안정적인 직업이 있어야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여겨 간호조무사가 되려는 거예요. 학교 갈 때 빼놓고는 모든 시간을 아이와 보내요. 주민센터에서 장난감을 대여해 놀게 하고 잠들 때까지 책도 읽어주고 남들과 똑같은 엄마 노릇 하려 애씁니다.”(김씨)
 “미혼모를 덜 성숙하다고만 보는 시선이 있어요. 하지만 엄마가 돼 보니 달라요. 준비 없이 갑자기 엄마가 됐지만 아이 양육을 잘하기 위해  ‘부모교육’도 열심히 받고 있어요. 방에 TV가 있지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아이한테는 절대 안 보여줘요.”(배씨)
 애란영스빌 표승희 원장은 “어리지만 생명을 지키기 위한 용감한 결정을 하고 아기를 잘 키우기 위해 애쓰는 이곳 엄마들 모습들이 고맙고 대견하다”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애란원에 설치된 나래대안학교에서 미혼모 학생들이 수학 수업을 하고 있다. 김남중 기자

서울 서대문구 애란원에 설치된 나래대안학교에서 미혼모 학생들이 수학 수업을 하고 있다. 김남중 기자

#미혼모 배움터 나래대안학교
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대동문길에 위치한 애란원 내 나래대안학교. 10대 미혼모 4명이 재학 중인 고등부 교실에서 수학 수업이 한창이다. 머리끈으로 뒷머리를 동여맨 모습이 여느 여고생과 다를 게 없다. 김나예(32) 교사가 벤다이어그램을 그려가면서 집합을 설명한다. 학생들이 교사 질문에 한목소리로 대답한다. “서로소가 뭐지요?” “교집합의 원소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일반 학교 교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나래대안학교는 임신으로 인한 학업 중단을 예방하기 위해 애란원이 위탁 운영하는 중·고교 과정 대안학교다. 과정을 마치면 이전에 다녔던 원적학교의 졸업장을 받는다. 임신과 출산의 힘겨운 상황에서도 이곳에서 학업을 지속한 미혼모 학생이 2010년 이후 110명이다.
 9개월 된 딸을 둔 ‘학생 엄마’ 조모(18)양과 얘기를 나눴다. 지난해 5월 말 임신 상태로 애란원에 들어온 조양은 곧바로 나래대안학교에 등록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 휴학부터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계속 공부하면 다니던 학교 졸업장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공부하는 게 힘들지는 않을까. “몸은 힘들지만 일반 학교에서 못 따라갔던 수업을 여기 와서 오히려 잘하고 있어요. 학생이 적으니 샘들이 더 자세히 잘 가르쳐 줘요. 모르는 걸 언제든 물어볼 수 있고요. 선생님들이 정말 다 선해요. 이젠 대학 갈 생각까지 갖게 됐어요. 간호대에 가서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조양은 “웃는 아기를 보면 신비롭고 신기하다. 그때마다 아이를 끝까지 보호하고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한다. 공부를 마치고 졸업할 수 있게 되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커질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3년 전 나래대안학교에 온 김 교사의 눈에 비친 미혼모 학생들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엔 수업이 제대로 될까 걱정했는데 정말 적극적이고 열심히 공부해요. 학업을 마치고 졸업을 해야 아이를 제대로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인 거죠.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갈 때가 아니면 수업에 빠지지 않아요. 어린 엄마들이 정말 어른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서울여대 학생들이 애란원의 미혼모들을 방문해 남긴 응원 메시지.

서울여대 학생들이 애란원의 미혼모들을 방문해 남긴 응원 메시지.

 김 교사는 휴대전화에서 사진 한장을 찾아 보여줬다. ‘미혼모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세요’란 글귀가 적힌 모니터 화면이다. 미혼모 학생들과 청와대 체험수업을 갔을 때 한 학생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쪽지’ 게시판에 남긴 글이란다. 김 교사는 “세상에 나가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바램을 담은 듯했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구나 싶어 마음이 짠했다”고 말했다.
 미혼모들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것일까. 고등부 교실 맞은편 식당 입구 게시판엔 응원 문구가 담긴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다. 며칠 전 후원금을 들고 온 서울여대 학생들이 남긴 것이다.
 ‘숨지 말고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어 주세요’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는 비혼모분들 너무 멋있습니다’.
 이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서울여대 3학년 박근영씨는 “혼자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결정한 큰 용기와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미혼모도 같은 사람, 평범한 어머니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애란한가족네트워크에는 미혼모를 보듬는 따뜻한 시선이 담긴 후원금과 후원 물품이 줄을 잇는다. 지난해 600여 개인·단체가 4억3000만원이 넘는 정성을 모았다. 애란한가족네트워크를 이끄는 강영실 대표원장을 만났다.

-애란한가족네트워크가 지향하는 소명은 뭔가.
“실수로 잉태되는 생명은 없다. 모성을 보호하고 생명을 살리고 가족을 보존하는 일이 우리의 소명이다. 준비되지 않은 임신을 자력으로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제도적 뒷받침도 미흡하다. 애란한가족네트워크는 미혼모의 출산부터 양육, 자립까지 3단계 시스템을 갖춰 원스톱으로 지원한다. 여기에 온 미혼모들이 2000년 이전에는 아기를 전부 입양 보냈지만 지금은 80% 정도가 양육을 선택한다.”
-청소년 미혼모가 대부분인데 여기를 거쳐 가면서 어떻게 달라지나.
“힘들었던 아이들이 오는 경우가 상당수다.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꿈이 없다’고 하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 나래대안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해 어떻게든 졸업을 하거나 내일이룸학교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밝아진다. 꿈을 갖게 됐다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보게 됐다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무엇보다 사회에 나가 일반인으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게 정말 고마운 일이다.”
-청소년 미혼모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미혼모가 되는 세 가지 변수를 지적하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가족돌봄 결핍, 진로 발달 부재로 인한 미래 무망(無望), 잘못된 성문화가 그것이다. 아이들만의 잘못이 아닌데 우리 사회는 예방도, 사후 지원도 부족하다. 엄마이기 이전에 청소년이기도 하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돌봄이 부족했다는 관점에서 보다 촘촘한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 엄마와 아이들을 함께 품어주는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1984년부터 35년 동안 애란원 등 애란한가족네트워크의 돌봄을 받은 미혼모는 5800여 명에 이른다. 이틀 동안 돌아본 이곳은 강 원장의 말마따나 ‘미혼모를 위한 희망과 가능성의 공간’이었다.